파리서 만난 신여성 나혜석·백남순… 종착지는 어땠을까
1928년 프랑스 파리. 조선에서 온 신여성이 만났다. 나혜석(1896∼1948)과 백남순(1904∼1994)이다. 백남순은 여성 최초의 파리 미술 유학생이었고, 나혜석은 외교관인 남편 김우영을 따라 세계 일주를 하던 길에 들렀던 것이다. “남순아, 우린 조선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인물들이야. 나랑 같이 파리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자.”
나혜석과 백남순은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동창이다. 일본 유학파로는 선배인 나혜석은 예술의 수도 파리에서 미술 수업을 하는 백남순이 부러워 함께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남편 김우영은 “조선 미술과 역사를 빛낼 중책을 가진 몸이니 아내로만 생각하지 말아주시오”라는 나혜석의 간청에도 빙그레 웃기만 할 뿐 허락하지 않았다. 속이 상한 나혜석은 백남순에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그림은 그려서 무엇에 쓰게. 너도 시집이나 가라, 얘.”
한국 여성 서양화가 1·2호를 기록한 나혜석과 백남순의 이후 인생 행보는 어떻게 됐을까. 그 종착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수원시립미술관에 나왔다. 최근 개편한 소장품 상설전 ‘물은 별을 담는다’에서다. 전시는 소장품 총 260점 중 46점을 ‘물의 도시, 수원(水原)’이라는 지명에 착안해 엮었는데, 가장 볼거리는 나혜석의 ‘염노장’(1937년대 후반 추정)과 백남순의 ‘한 알의 밀알’(1983)이다. 둘 다 신산한 인생사를 거치며 신앙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 불운한 말년이 연상이 돼 슬픔을 자아내는 유화들이다.
최초로 공개된 ‘염노장’은 나혜석이 이혼한 뒤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스님으로 있는 친구 김일엽을 찾아가 수덕여관 등지에 머물던 시기(1937∼1946년)에 그렸다. 조선의 스타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과 불륜을 저질렀고, 이를 남편이 알게 되면서 1930년에 이혼을 했다. 나혜석은 조선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이 조용히 사그라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줄줄이 아이를 둔 엄마였지만, 1934년엔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고 잡지 ‘삼천리’에는 그 유명한 ‘이혼고백서’를 기고했다.
그 시절 이혼은 사회적 무덤이었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1931년 일본 문부성 주최 도쿄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 출품한 ‘정원’이 특선하며 사회적으로 재기하는 듯했다. 32년에는 다시 도쿄 제전에 도전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가 창작에 몰두하며 30여점의 유화를 그렸다. 하지만 숙식을 해결하던 집에 불이나 작품 태반이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1935년에는 소품 200여점을 가지고 전시를 열었지만 더 이상 주목 받지는 못했다. 수덕여관에 10년간 머물던 나혜석은 심신이 미약해져 47년에 보육원으로 옮겼고, 48년에 행려병자 신세가 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수덕여관 시절에 그린 ‘염노장’은 수덕사의 비구니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갈색 어두운 의복과 무심한 표정에는 체념이 서려 있다. 붓의 터치는 아주 잘아지고 힘이 없어 말년에 수전증을 앓았던 나혜석의 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나혜석은 뜨거운 창작욕으로 생전 300점 이상을 발표했지만 현전하는 작품은 20여점, 이 가운데 출처가 확실한 것은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나부’ ‘김우영 초상’ ‘염노장’ 등 10여점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민승 학예사는 “‘염노장’은 옥션을 통해 수 차례 거래되었고, 최종 이를 소장한 개인으로부터 구입했다”면서 “그림의 모델이 수덕사의 당시 비구니이며 이 그림을 그리는 걸 목격했다는 김일엽의 아들의 증언도 있었다”고 말했다.
백남순의 삶도 신산했다. 백남순은 나혜석의 ‘저주’대로 파리로 유학 온 미국 예일대 출신 청년 화가 임용련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1930년 귀국한 둘은 동아일보 사옥에서 부부전을 열며 화려한 신고식을 했다. 남편 임용련이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오산중학교에 미술 및 영어교사로 부임하자 백남순도 따라갔다. 이중섭이 바로 이들의 제자였다. 부부는 해방 직후 서울로 내려왔고, 정부가 수립되며 임용련은 서울세관 관장을 지냈는데, 그 이유로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 끌려가 처형됐다. 이때의 참혹한 경험 탓에 백남순은 붓을 꺾었다. 그러고는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잊힌 존재가 됐다. 백남순이 그렸던 그 많은 그림도 월남하면서 두고 내려오는 바람에 전부 소실됐다. 친구에게 선물 준 ‘낙원’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가며 해방 이전에 그린 유일한 그림으로 공개된 적이 있을 뿐이다.
백남순은 1981년 ‘계간 미술’ 여름 호에 인터뷰가 실리며 한국 사회에 소환됐다. 당시 77세였다. 한국 최초의 미술전문기자로 통하던 이구열씨가 주선해 현지 특파원 발로 ‘반세기 만에 뉴욕화실을 공개한 첫 부부 화가 백남순 여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던 것이다. 백남순은 화가의 꿈을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었다. 뉴욕 자택의 3평쯤 될 거실을 아틀리에로 쓰면서 말이다. 이즈음 그가 그린 그림에는 신앙의 향기가 있었다. 전시에 나온 ‘한 알의 밀알’은 밀알에서 생명이 퍼져 나가는 걸 추상화했다.
백남순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하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나혜석이나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그림 공부에만 전념했더라면 피차 기구한 운명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은 작품을 남겼을 터인데…. 그때 정월(나혜석)과 헤어진 것이 천추의 한이 되는군요.”
전시에서는 다른 소장품인 나혜석의 ‘자화상’(1928)과 백남순의 ‘한알의 밀알’을 한 공간에서 마주보게 배치했다. 노년의 백남순이 나혜석의 젊은 자화상을 통해 파리에서 함께 화가의 꿈을 키우던 청춘시절을 회상하듯이. 아쉽게도 ‘자화상’은 복사본이다. 내년 2월 18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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