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해결하고, 임대주택도 늘리는 '묘수'가 있습니다
[이성영 기자]
▲ 지난 4월 18일 오후 서울 시내 아파트. |
ⓒ 연합뉴스 |
참여연대가 '윤석열 정부 1년'을 평가하며 퇴행의 한 측면으로 '공공임대주택 축소'를 꼽았다. 지난해 8월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 거주하던 발달장애인 일가족 3인이 집중폭우로 참변을 당한 후 정부는 반지하 등 재해취약주택 거주자의 공공임대주택 우선입주권 보장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2023년 정부 예산에서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5조 원 이상 삭감했다.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20% 이상 삭감하는 와중에 취약계층용 공공임대주택 공급 물량은 문재인 정부보다 5만1천 호 더 많이 짓겠다고 한 정부의 발표를 국민들은 믿을 수 있을까? 말과 글은 거짓말을 해도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정부의 예산이 어느 계층에게 더 많이 배분되고 있는지를 보면 정부의 진의를 알 수 있다.
을과 을의 갈등을 부추기는 정부
공공임대주택 예산이 대폭 깎인 것으로도 모자라 설상가상 민간임대시장에서는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주거취약계층 입장에서는 봄이 와도 봄을 느끼기 어려운 시절이다. 전세 가격 정점이었던 2021년 하반기, 2022년 상반기 계약종료일이 23년 하반기, 24년 상반기임을 감안한다면 당분간 주거취약계층의 주거불안과 전세사기 피해 상황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정부는 전세사기 문제 해법으로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거주하는 주택을 공공이 우선매수권을 통해 매입하여 쫓겨날 염려 없이 살도록 해주겠다며 LH의 2023년 매입임대주택 예산 5조5000억 원을 사용하여 전세사기 피해자 거주 주택을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장 쫓겨날 처지에 놓여있던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 국회 진입 시도하다 주저앉은 전세사기 피해자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안 등을 심의하기 위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토법안심사소위원회가 열린 16일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소위가 열리는 국회 본관 입구 진입을 시도하다 방호과 직원들에 가로막혀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다. |
ⓒ 남소연 |
공공임대주택을 대폭 늘릴 방법
정부는 매입임대주택 예산을 놓고 을과 을의 경쟁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매입임대주택 예산을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주거취약계층이나 전세사기 피해자를 지원하는 방안만이 아니라 부족한 한국의 공공임대주택 물량을 저렴한 비용으로 대폭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지난 4월 20일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공공이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매입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밝힌 지 하루 만에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정부가 매입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어 27일 정부가 내놓은 구체적인 종합대책 내용을 살펴보면,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된 경우 문제의 집에 대한 경·공매가 유예된다. 또, 피해자에겐 임차인 우선매수권이 주어져, 자신이 살던 집을 먼저 사들일 수 있다. 만약 피해자가 집을 살 의사가 없다면, LH가 해당 주택을 매입해 공공임대주택으로 제공한다(참고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주택을 매입해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강제 퇴거를 당하지 않고 재임대를 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지, 이들의 보증금을 대신 주겠다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입장을 바꾼 데에는 이같은 '공공의 우선매수권 도입'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우선매수권이 도입되면 경매낙찰이 되었을 때 낙찰자보다 먼저 낙찰 가격으로 주택을 매수할 수 있기에 시세보다 대폭 저렴하게 주택을 매입할 수 있다.
공공이 우선매수권을 사용해서 주택을 매입한다면 시세보다 대폭 저렴하게 공공임대주택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는 복안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LH가 서울 강북구 칸타빌 수유팰리스를 최초 분양가 기준 15% 할인된 가격으로 매입했을 때 원 장관은 자신의 SNS에 글을 올리고 "내 돈이면 이 가격에 안 산다"라며 공공이 비싼 가격에 주택을 매입하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전세사기 피해주택 매입을 명분으로 공공의 우선매수권 조항을 도입하면 앞으로 악성 미분양으로 경매에 나온 아파트들을 경매 낙찰가 수준으로 저렴하게 공공이 매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원 장관도 이 점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현재 매입임대주택 입주 대기자가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세사기 피해자뿐 아니라 반지하·고시원 등 최저주거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주택에서 살아가는 가구가 여전히 수도권에 5% 이상이다. 공공임대주택의 적극적인 공급이 필요한 상황이다.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매입임대주택 예산을 증액 편성하여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과 함께 반지하·고시원 등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대폭 늘려야 한다.
사실상 공공임대주택이라고 보기 어려운 10년 분양전환임대주택이나 전세임대주택을 제외하면 한국의 장기 공공임대주택 재고량은 5% 수준에 불과해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공공의 우선매수권을 도입하겠다고 한 마당이니 추경예산으로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늘릴 필요가 있다. 늘어난 공공임대주택 예산으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주택을 매입할 뿐 아니라 악성미분양으로 인한 건설사들의 처치곤란 아파트들이 경매로 나올 때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하여 공공임대주택 재고량을 대폭 늘릴 수 있다면, 전세사기 피해로 인한 거대한 사회적 손실을 전화위복으로 전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묘수를 정부가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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