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자 엄마... 아이 감기 한 달, 삶이 흔들립니다
[최지현 기자]
세 살 아이가 한 달 넘게 각종 바이러스와 동거 중이다. 코로나 기간 동안 내성을 형성할 기회가 없었던 많은 영유아들이 최근 겪고 있는 일이라 들었다. 하나의 바이러스가 떠나면 기다렸다는 듯 또다른 바이러스가 찾아왔다.
근 한 달을 괴롭혔던 온갖 감기 증상에서 이제 해방 좀 되는가 싶어 안도하던 차였다. 밤중에 자던 아이가 갑자기 온몸에 힘을 주고 배가 아프다고 울기 시작했다. 이제 웬만한 말을 구사할 줄 아는 아이는 몸을 비틀며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약 먹어도 아프면 어떻게 해요?" 같은 질문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아이의 복통은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 사라졌다 다시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엄마의 손길마저 거부할 정도로 아픈 아이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가 치아를 부르르 떨 정도의 고통에 시달릴 때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새벽에 난데없이 찾아온 간헐적인 통증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응급실이었다.
응급실에 데리고 가면 아이만 고생이라는 남편도 이틀째 같은 양상으로 찾아오는 통증을 보고는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응급실행 두 번, 소아과행 두 번 끝에 아이는 다시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먹기 시작하며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시간이 나타나 다시 또각또각 흘러가기 시작했다.
▲ 수액 맞는 아이. |
ⓒ 최지현 |
나는 아픈 아이를 돌볼 책임을 지고 있는 여느 대한민국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으면 정해진 시각에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잊을 만하면 변수처럼 등장하는 아이의 질병에 언제나 허둥댄다. 아이가 아픈데 다른 뭐가 중요할까마는 아이가 아파 회사에 조금 늦게 되었다, 아이가 아파 회사에 못 나갈 것 같다는 말을 상사에게 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출근하기 싫어서 둘러대는 핑계처럼 보일까, 아이 키우는 거 유별나게 티낸다 생각할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단어 하나하나 고민이 여간 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미룰 수 없는 일, 후다닥 카톡을 보낸 후 핸드폰을 멀리 치우고 나면 회의가 밀려든다. 아이가 아픈 상황에서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와 내가 처한 현실이 어처구니 없이 느껴진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아이가 아픈 건 처음인데 이 일을 겪고 보니 1년에 유급으로 제공되는 가족돌봄휴가 이틀은 어림도 없는 것이었다(무급으로 10일까지 가능하지만 사실 10일도 턱없다). 그 이틀은 이전의 병원행, 어린이집 상담일정 등으로 진작에 소진되었다.
연가를 쓰면서도 아이가 많이 아프냐는 동료직원의 질문에 필요 없는 바이러스명까지 거론하면서 해명 같은 설명을 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뒤돌아서면 회사에 자주 빠지네, 나도 애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환청이 들려온다. 한때는 나의 것이었던 목소리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아이의 고열과 통증이 지속되어 겨우 하루 휴가 내고 소아과를 찾으면 대기만 1시간이 우습다. 그마저도 이쯤되면 한 차례 사람들이 빠져 있지 않을까 싶어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대를 선택해서 간 결과다. 주말에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기운 없는 아이를 데리고 2시간 이상 기다릴 각오는 필수다.
직장인이라면 주말 소아과 오픈런이 익숙할 것이다. 주중에 미뤄두었던 아이의 진료를 받으러 와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미룰 것이 따로 있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회사에 갑자기 휴가를 냈을 때 감당해야 할 것들과 아이의 아픈 정도를 저울질하게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아이도 나도 지쳐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가까스로 호명되어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더니 의사가 아이의 증상에 대해 묻다가 나의 '무관심'을 탓한다. 그리고는 오라는 날에는 왜 안 왔는지를 추궁한다. 급작스러운 공격에 억울한 마음이 차오르다가 더 신경을 썼다면 아이가 금방 나았을까, 자책하게 되어 버리는 엄마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약은 이틀 치 지어준다. 이틀 후에 또 오라며.
도대체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다들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한참 전에 육아를 졸업한 부모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절절대며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끝도 없는 학원 셔틀을 돌리고, 저녁 늦게까지 방과후교실에 아이를 묶어 두어야만 하는 걸까.
퇴근하는 동시에 육아전선에 투입되어 아이의 수면과 함께 기절하고야 마는 하루 말고, 아이와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을 온전히 누리는 하루를 살고 싶다. 출근시간에 쫒겨 등원을 채근하는 모습이나 온종일 노동과 스트레스에 찌들어 쉬고만 싶은 퇴근 후 모습 말고 아이의 눈을 맞추고 아이가 하는 말에 천천히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노동시간을 줄이고 육아와 가사를 사회 공동의 문제로 인식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지금 마주한 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우리나라가 OECD 가입국 중 출산율이 최저인 사실보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기를 선택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이다.
직장의 문제
7명으로 구성된 사무실에서 돌봄이 필요한 영유아를 양육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사람이다. 그렇지만 아이를 돌보기 위한 휴가를 내는 사람은 나뿐이다. 현재 나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최대 2년까지 허용되는 육아기 2시간 단축근로를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양육자인 남자 직원은 이 제도를 이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상사에게 양해를 구하여 근로시간 중 1시간을 아이의 하원에 할애하고 있다.
공식적인 제도가 있으니 나처럼 결재를 올리시라고 권해봐도 손사래를 친다. 오히려 자기가 얘기해줄 테니까 나도 자신처럼 결재를 올리지 않고 단축근로를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물론 상사의 개인적인 인정에 호소하는 편법을 사용해서 아이를 양육하는 시간을 벌고자 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육아와 관련된 휴가가 여성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유별난 남성'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그 분위기는 일견 여자 직원들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좋은 회사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시를 낳지만 그건 절반 정도의 진실이다. 회사에 다니며 '애 낳고 키우기 좋은 직장'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어쨌든 임신했다고 사직을 권고한다거나, 육아휴직을 하려면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으니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회사가 '여성친화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요즘) 여자 직원들은 휴직해버리면 그만 아니냐, 복직 후 마음에 안 드는 업무에 배치될 것 같으면 휴직을 연장한다고 하면서 휴직을 무기처럼 쓰더라, 묵묵히 힘든 일 도맡아서 하는 건 우리다, 같은 불만이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아이를 낳고 키워 본 여자 직원들이 '라떼에 비해' 획기적으로 좋아진 제도 속에서 '나약해진 요즘 여성 직원'들을 탓하기도 한다. 이런 불만 속에는 임신부터 육아까지 일련의 과정을 휴직을 가능케 하는 사유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직장생활의 고단함과 팍팍함이 스며 들어 있다.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로서의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고려는 찾아볼 수 없다.
육아, 나아가 돌봄의 문제를 공동체의 과제가 아닌 개별 가정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 그 중에서도 여성에게 최종 책임을 떠넘기는 것, 남성을 가정에서 떼어내고 그 대가로 회사의 인정과 더 빠른 승진을 암묵적으로 보장해주는 것, 그럼으로써 남성을 점점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 그렇게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피해의식을 남기고 성별갈등을 조장하는 것, 여전히 저녁에 회식을 하는 것,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을 업무에 대한 성실함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의 척도로 판단하는 것, 육아 시간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직원의 배치를 거부하거나 일정 기준 이상 휴직한 사람들을 승진 대상자에서 배제하는 것, 그것은 남성을 위한 것도, 여성을 위한 것도 아니다.
▲ 돌봄의 문제는 아이가 있든, 없든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
ⓒ 최지현 |
이 시대의 양육자로서 나에게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비롯한 노동환경의 획기적인 전환과 더불어 실질적인 돌봄 동지가 필요하다. 개별적인 사정에 좌우되지 않는 견고한 네트워크, 즉 안정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양육자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육아 파트너는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기관일 것이다. 아이는 부모보다 보육교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양육자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전문적이고 안전한 보육시설의 확충, 보육전문가의 양성, 이들 전문가에 대한 적절한 대우와 보상은 무척 중요하다.
보육은 단순히 아이가 물리적으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의식주를 제공하는 소극적인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발달단계별 특징과 그에 따른 심리와 행동을 인지하고 각 단계별로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는 총체적인 예술에 가깝다는 것을 많은 양육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보육자의 자기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 과정은 어쩌면 심리적 자가상담-진단-치유를 하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 또한 말이다.
그렇기에 보육에 있어서도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확연히 구분된다. 양육자들이 <금쪽같은 내새끼>와 같은 tv 프로그램이나 보육·교육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육아에 관한 팁과 조언을 얻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매체를 통하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육아 전문가들이 이미 보육의 현장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집 어린이가 만난 첫 번째 선생님은 그런 분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걱정과 불안 없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회사에 나갈 수 있었다. 가끔은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인 나 자신까지도 돌봄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은 모두를 위한 공유재가 되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는 운이 아주 좋은 경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보육기관에 이런 선생님들이 있다면, 양육자들은 신뢰할 만한 기관을 찾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고 평판이 좋은 기관에 아이를 넣기 위해 무작정 순번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들의 경력과 전문성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적정한 임금과 휴가 등 실질적인 노동환경개선을 통해 보육교사들이 전문성과 자부심을 키워갈 유인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은 육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과 맞닿아 있다.
저출생 시대에 접어들어 보육의 당사자들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어린이집 밖에서 아이는 또래 친구보다 이모와 삼촌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그렇지만 보육을 돌봄의 영역으로 확장해본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인간은 언젠가는 누군가의 절대적인 돌봄을 받아야 하기에 결국 보육이 내포하고 있는 돌봄의 문제는 아이가 있든, 없든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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