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협회 안동지회조직, 일제에 구속

김삼웅 2023. 5. 1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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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4] 보수 유림의 비난과 일제의 감시로 난관에 부딪혀

[김삼웅 기자]

 석주 이상룡 선생
ⓒ 석주기념사업회 제공
 
1894년은 국내외적으로 격변의 해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이어 일본군이 수원 부근 풍도에서 청국군함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정부의 갑오개혁, 동학군 2차봉기 등이 계속되었다. 이땅의 남반부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시산혈해를 이루고, 북반부에서는 청일 양국군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피바다를 만들었다.

이해 이상룡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작고한 후 할아버지는 집안은 물론 문중의 큰 어른으로 친족을 이끌어왔다. 이상룡이 아직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동생들과 집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계셨기에 가능했다. 이제 그 버팀목이자 기둥이던 분이 떠나셨다. 

관례대로 3년상을 치루고자 할아버지의 선산이 있는 도곡마을로 들어갔다. 나라 안팎의 위기 소식은 여기까지 전해왔다.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는 청년 이상룡은 상중이었지만, 닥쳐오는 국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 서산 김흥락이 을미의병이 발의하고 나선 이래 의병활동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상룡은 서산을 통해 의병들과 맥을 유지하면서 할아버지의 상을 입은 것이다.   

집안의 불행한 일을 당해 깊은 산간 마을로 들어갔으나 나라의 어지러운 일들은 그곳까지 들려왔다. 그는 장차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쳐오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같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비록 상중이었지만 국난을 당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를 부리고 군사들이 사용할 새로운 무기를 고안하는 등 군사학을 연구하는 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병법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무감(武監)>이라는 책을 저술할 수 있었다. 화살을 잇달아 발사할 수 있는 재래식 무기인 연노(連弩)를 새롭게 고안해 더욱 빠른 속도로 화살이 나갈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주석 3)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안동에서는 치열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상룡도 적극 나섰다. 

이상룡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멸망으로 인식하고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군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구체적 방략과 대책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그 해 겨울 매제 박경종(영해 출신)과 함께 1만 5천 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차성충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김상태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자신을 포함한 유림계의 대응 태도와 입장에서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09년 4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석 4)

이상룡은 이 시기 충의사(忠義社)에도 참여했다.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재야 유생층이 주도하고 이들과 연계된 재경관인들이 조직한 결사였다. <충의사창립취지서>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강토를 보존하고 종사를 지키고, 생령을 받들기 위해 결사한다"고 밝힌 대로 항일구국결사였다.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각 시·도·군에 지사를 둔 충의사의 <서명록>에 따르면 안동부 관할지역 출신에는 이상룡을 비롯 이중식·이규락·김운락·김학모·이남우·유봉희·김진수·권정식·권유하 등 쟁쟁한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이상룡이 안동에서 의병활동을 하고 있을 때, 1907년 11월 서울에서 대한협회가 창립되었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윤호정·장지연·권동진·민영휘·장박·남궁억·유근·정교·이종일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대한협회는 강령에서 교육의 보급·산업의 개발·생명재산의 보호·행정 제도의 개선·관민폐습의 교정·근면저축 등을 내세웠다. 

중앙조직에 이어 부(府)와 군(郡)의 지회를 설치하면서 대한협회는 1909년 4월 이상룡에게 안동지회 설립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간의 의병활동 등이 중앙에 알려진 것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답장을 썼다.

"나라를 위하는 도(道)로 사회보다 나은 것이 없고, 개인보다 못한 것이 없다. 사회단체가 아니면 내계(內界)를 발달시킬 수 없고, 사회단체가 아니면 외계와 더불어 경쟁할 수 없다. 열강들이 강대한 것도 이 도를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석 5)라고 하면서 국가의 발전에 사회단체의 조직이 꼭 필요하다고 답신했다.

이상룡은 안동지회를 조직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갔다. 의병의 배후라는 이유였다.
 두 가지 측면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보수 유림의 비난과 일제의 감시가 그것이다. 이상룡은 당시 "영남 유림들이 대개 먼 시각을 고집하여 세상의 변화에 맞추려하지 않는다"하여 협회의 지회설립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걱정하였다. 한편 일제도 이상룡을 비롯한 일부 유림의 대한협회 설립 움직임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빌미를 만들어 이상룡을 경찰서로  붙잡아들였다. 그러자 안동 일대의 민중들이 격렬히 저항하여 경찰에 끌려간 지 한 달 남짓 지나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 6)

대한협회는 1910년 9월 12일 경무총감부에 의해 해산당할 때 전국 회원이 7000여 명이고 지회는 77~100개소에 이르렀으며, 회원은 대체로 개화론자·전직관리·지주·상인·유생이고, 기관지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하였다.

대한협회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매국단체 일진회와 연합이 추진되었다. 이상룡은 이같은 소식을 전해듣고 안동지회장으로서 중앙간부 권동진·홍필주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격렬히 반대하는 뜻을 밝혔다.

"일진회와 연합함으로써 얻은 것은 적고, 오히려 2천만 대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라고 성토하였다.    

주석
3> 채영국, 앞의 책, 36~37쪽.
4> 김희곤, <이상룡>, <안동독립운동인물사전>, 341쪽, 선인, 2011.
5> <석주유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6> 김희곤, 앞의 책, <안동의 독립운동사>,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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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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