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책

배여진 2023. 5. 16. 14: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책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 나의 이동권 이야기> 를 읽고

[배여진]

 <이규식의 세상속으로>책 표지
ⓒ 후마니타스
이규식. 내가 아는 이규식은 무표정으로 있을 땐 경찰들의 기도 죽일 수 있는 '인상파' 활동가이지만, 씩 하고 한 번 웃으면 '미소 천사'로 돌변하는 사람이다.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규식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가 소주를 콜라잔에 따라 마시는 걸 보고 나는 중증장애인에 대한 마지막 편견을 날려버렸다. 소주를 글라스로 마시는 중증장애인이라니.

일주일의 절반은 취해 살았던 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였다. 내가 중학교 때 꽃동네로 봉사활동을 가서 만났던 중증장애인의 모습과 이규식과의 간극은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컸다.

꽃동네 봉사활동이 꺼림직했던 이유

중학교 때 꽃동네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 함께 다녀온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나누었던 소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장애인에 대해 편견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봉사를 하고 나니 장애인들은 천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말이 작은 것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줬습니다."

대충 이런 소감이었던 것 같다. 사실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왠지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소감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수저질이 힘든 한 장애인의 식사를 도왔다. 거기에 계신 장애인들은 대부분 바리깡으로 밀어버린 짧은 머리였기에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은 얼굴 선의 굵기를 보고 판단했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나보다 당연히 어리다고 생각하고 나이를 물어보니 나보다도 한참 언니였다. 난 내가 언니라고 생각하고 말투부터 사용했던 단어까지 다 내가 언니인 것처럼 말을 했었는데 말이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언니가 너무 어려 보여 난 내가 언니인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세상 방정 맞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시키고, 밥을 먹여주려는데 그 분이 식판에 있는 밥과 반찬을 다 섞어서 주라고 손짓으로 말했다. 시키는 대로 다 섞고 나니 내가 가진 식욕도 도망갈 정도의 식판이 되었다.

흡사 개밥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았다. 수시로 찾아오는 봉사자들 덕분에 시설의 구석구석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고, 자신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봉사자들을 쳐다보는 장애인들의 시선은 공허했다. 방 안에서 티브이를 보거나, 넓은 강당을 왔다갔다 하는 그들을 보며 참 무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식사 시간. 꽃동네의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시설의 어느 어른이 함께 오시더니 "신부님께서는 여기 장애인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시니 정말 대단하시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셨다. 내가 중학생이긴 했지만 그게 왜 대단하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장애인 시설로 봉사활동을 몇 차례 다녀왔지만 그 때마다 계속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내가 분명 '착한 일'을 하는 건 맞는 거 같은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설 장애인들의 시선은 무미건조했고, 별로 보람이 들지 않았다.

약 10년 뒤에 나는 내가 가졌던 불편함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인권 활동을 하면서 깨달았다. 이규식의 말마따나 누군가에게는 그 시설이 세상이 만든 감옥이나 다름 없는 곳일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말이다.

이규식의 무모한 도전

이규식. 그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다. 한국 사회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생애사를 지인 3명의 도움으로 글로 엮어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평생 '병신'이라는 욕을 듣고 살아온 뇌병변 장애인 이규식이 '싸울 땐 싸우고 놀 땐 놀면서 투쟁하는 휠체어'를 타고 달려온 자신의 삶의 궤적을 소개한다.

그의 삶은 '무한도전'이다. 책 서문에서 그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은 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에 계속 도전했다고 말한다. 싸울 때처럼 놀 때도 확실히 놀고 싶었다는 이규식. 소주가 가득 담겼던 글라스는 그가 확실히 놀았다는 증거물이고, 증인은 수두룩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갸우뚱 한다. 분명 이규식 개인의 생애사인데 장애인권운동의 역사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은 기분 탓인가. 그는 책에서 "내 인생의 전반부는 갇혀 있던 삶이었고, 후반부는 싸우는 삶이었다"(p.10)라고 밝힌다.

그는 여느 중증 장애인들처럼 집에만 있다가 장애인 시설과 공동체에서 오랜 시간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지루하고 재미없어도 안전하니까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걸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p.57)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홀로 제주도 여행을 떠난다. 그 시절에는 활동지원사도 없고, 저상버스도 없던 때였다.

그의 무한도전, 아니 무모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 <빠삐용>의 빠삐용이 주변에 바다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교도관도 없는 외딴 섬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코코넛 껍질을 엮어 만든 뗏목과 함께 망망대해로 몸을 던져 떠나는 장면처럼, 이규식은 수동휠체어에 몸을 싣고 제주도로 떠난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온 뒤 선물 받은 전동 스쿠터를 타면서 이동의 자유를 한껏 느낀 이규식은 결국 공동체를 나오며 인생의 1막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노들 장애인 야학에 다니며 인생의 2막이 열린다.

노들 장애인 야학에서 그는 학교 공부도 배웠지만 다른 사람들과 관계맺는 방법을 제일 크게 배웠다고 밝힌다.(p.75)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장애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99년 6월, 혜화역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다 살아났다. 이후 그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함께 하게 된다. 지하철 선로에 몸을 묶고,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며 한 달에 한 번씩 버스를 타는 직접행동에 나섰다.

버스를 막고 비장애인 활동가들은 버스 위에 올라가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라는 현수막을 펼치는 투쟁을 4년을 했다. 경찰에 연행도 되고, 시민들에게 욕도 얻어 먹고, 응원과 지지를 받으며 목소리를 내다보니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도, 저상버스도 생겨났단다. 벌금과 함께! 이렇게 이규식은 장애인 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활동가, 그리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음 소장을 하며 굵직한 장애인권운동 역사에 함께 한다.

철로에 몸을 묶고 버스를 막던 그는 시설 민주화 투쟁,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투쟁, 장애인 탈시설 운동, 그리고 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활동을 하며 휠체어에서 내려와 한강대교를 기어 건너고, 여러 농성장에서 농성을 하며 장애인권운동 곳곳을 누빈다.

그리고 요즘의 그는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욕을 무더기로 얻어먹으며 지하철 출발을 지연시키고, 탑승하여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며 장애인들의 권리를 온몸으로 소리치고 있다. 아무리 기자회견을 하고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도 뉴스에 한 번 안 나오던 그들의 요구와 목소리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며 투쟁을 하자 드디어 뉴스를 장식하고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비난의 화살도 많이 받고 있지만 말이다.

인간 이규식의 역사, 장애인 운동의 역사

난 그들에게 빚이 있다. 그들이 지하철 선로에 몸을 묶고, 버스를 막고, 누구는 감옥 살이를 하고 엄청난 금액의 벌금을 받으며 투쟁해서 일궈낸 결과물들에 무임승차 했기 때문이다. 이규식과 동료들이 그렇게 싸워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만들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며 유아차를 이용해 지하철을 탈 때마다 공익근무요원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유아차를 들어 올려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며, 터질 듯 튀어나온 만삭의 배, 그리고 출산 뒤 아기띠를 두르고 힘겹게 매번 서너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버스를 탔을 것이다.

난 그들의 투쟁 덕분에 그나마 좀 덜 불편하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했고, 하고 있다. 내가 이 빚을 갚을 방법은 이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이들이 지하철 지연 투쟁을 할 때마다 인터넷 뉴스의 댓글이나 지역 맘카페에는 이들을 비난하는 글들이 수없이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적어도 우리가 유아차를 가지고 지하철역사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본 엄마들이라면 정당한 비판은 할 수 있지만, 근거 없고 과도한 비난은 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는 댓글을 남기며 내가 나의 자리와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한편 이 책에서 이규식은 제법 인간미가 넘친다. 지하철 선전전에 나가기 위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는데 이 생활이 1년이 넘으니 몸도 마음도 고된 시간인 것. 그래서 이규식은 자신의 활동지원사가 하루 정도는 아프기를 자신이 불러도 활동지원사가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랐다고 고백한다.(p.7)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널 때에는 빨리 연행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또 그는 자신의 연애 스토리도 고백하며 이 책이 '장애인권운동역사책'으로만 남지 않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바다 수영을 하고 다이빙도 했다. 이규식이 경찰도 덜덜 떨게 하는 '인상파'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소천사 이규식도 된 이유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힘겨운 투쟁 속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그리고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마치 무모한 도전 같았던 그의 삶이 무한도전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인간 이규식의 생애사이기도 하지만, 장애인권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데 그치지 않고 이 땅에서 장애인의 삶이 어떤 방식을 통해 조금씩 진보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전장연 시위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래, 당신들이 욕을 할 땐 하더라도 일단 이 책을 읽어보고 욕을 하시라고.

이 책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등록된 장애인 수는 265만 4000명이라고 한다.(2023년 1월 기준, 보건복지부 발표) 스무 명 중 한 명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주위를 살펴보자. 내가 만나는 장애인들은 몇 명 정도 되는가? 자녀들의 학교에는 몇 명의 장애인이 다니고 있는가? 회사에서는? 버스에서는? 지하철에서는?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전장연 활동가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단순히 지하철을 지연시켜 시민들의 출근을 방해해서가 아닌 것 같다. 장애인은 고분고분 비장애인들의 말을 잘 듣고,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시민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민'들이 도움을 줘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들인데 그들이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목소리를 내니 여기서 오는 거부감도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책을 그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세상이 만든 감옥을 깨고 나와 글라스로 소주를 마시며 투쟁도 하고, 바다 다이빙도 하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 지금, 여기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내 비록 오랜 휴지기로 술도 잘 못 마시는 신세가 되었지만, 언젠가 이규식과 다시 함께 술자리를 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의 글라스에 소주 한 잔 가득 따르고 싶다. 친절하게 절반만 따라줘야지.
 
"아마 지금 누군가가 다시 나에게 공동체 혹은 시설로 돌아갈 거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대답은 "아니오."다. 가끔 비탈길에 휠체어가 넘어질 뻔도 하고, 신호를 잘못 봐서 사고도 날 뻔하고, 돈이 없어 굶을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게 나의 선택이고 나의 자유다. 주는 것만 먹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과를 아무 의미 없이 하기보단 다소 위험하더라도 자유가 있는 지금이 훨씬 좋다." (p.6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배여진 시민기자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