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똥으로 만든 그림책... 관광객 사로잡은 제주 동네책방 [제주 사름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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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기자]
▲ 동네책방 어나더페이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의 작은 책방으로, 어나더페이지는 또다른 사회와 세계를 만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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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랐고, 여기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니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났죠. 그리고 서울에 가서 또 다른 사회를 만났고, 그 후엔 필리핀이나 몽골 스리랑카에서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 일하면서 역시 새로운 사회,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인생에 새로운 문을 연다는, 그런 기분을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이런 경험을 책방에 녹여내 손님들도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또 다른 장을 여는 곳이란 의미에서 '어나더페이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게 된 겁니다."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대정초등학교와 담을 이웃한 작은 동네서점 '어나더페이지'의 책방지기 신의주 대표. 30대 여성의 소박한 로망을 실현하고파 책방을 열지 않았을까, 하는 진부한 짐작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그가 경험한 새로운 사회, 그리고 그곳에서 느끼고 깨닫게 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나더페이지라는 책방이 확고한 방향성을 지닌 단단한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어나더페이지 내부 모습 신 대표는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큐레이션 책방을 지향하고 있는데, 환경 로컬 다양성을 주제로 서가를 구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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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되고 싶어 사회학과로 진학했어요. 종군기자가 돼 사람들이 잘 모르는 참혹한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깊은 고민 없이 그냥 멋져 보였다고나 할까요. 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사회의 불합리한 것들이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많이 깨달을 수 있었어요. 특히 사회운동론 수업에서 전 세계의 사회운동에 대한 사례 연구를 했는데, 그때 제 눈에 들어왔던 게 '공정무역'이란 이슈였습니다. 생산자에게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공정무역과 불공정무역으로 구분합니다. 불공정무역의 사례로 널리 알려진 커피의 경우, 소비자에게 한 잔에 5천 원 받는다면 이를 생산하는 농민에게는 불과 몇십 원 정도밖에 지불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항상 커피와 초콜릿을 손에 쥐고 있었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이 커피와 초콜릿이 불공정무역의 대표적인 제품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어요. 얼굴 한번 마주 보지도 못한 노동자들과 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겁니다. 처음엔 이런 불공정무역 제품을 사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친구들 모두가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합리한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직접 현장을 보고 싶어졌어요."
'신의주 학생'은 이런 생각이 들자 휴학을 하고 서울로 간다. 서울의 한 민간 싱크탱크가 운영한 희망제작소에서 6개월간 인턴 생활을 한 뒤 필리핀으로 향했다. 국민은행과 YMCA가 합작해 만든 '라온아띠'(아시아의 친구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중장기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었는데, 신의주 학생이 머문 곳은 필리핀에서도 낙후한 지역인 산파블로 시티였다.
"처음 한 달은 아무것도 안 하고 지역민들한테 인사하러 다니며 관계 맺기에 주력했어요. 사실 대학생이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아이들한테 영어 ABCD를 가르쳐줄 수 있긴 하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 성장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6개월간 있으면서 처음엔 제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친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으로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들을 노동자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있잖아요. 돈 벌러 왔으니 일이나 열심히 해라, 하면서 말이죠. 특히 피부가 검거나 영어를 쓰지 않는 외국인일수록 더 하대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필리핀 친구들은 너무나 순수했고 진정한 친구로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이 친구들이 한국에 가서 일하겠다고 했을 땐 걱정이 앞서는 겁니다. 한국의 노동환경이 안 좋은데, 정말 친구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을 하게 됐어요."
▲ 어나더페이지 공용 서가 공정무역 커피를 주문하면 별도로 마련한 공용 서가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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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에서의 깨달음
신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자 본격적으로 해외봉사에 나서게 된다. NGO 활동가로 몽골에 파견돼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지대의 드림센터라는 사회복지기관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 게 그의 첫 소임이었다. 이 지역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기후변화로 더 이상 유목생활을 하기 어렵게 된 몽골 유목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거대한 슬럼가를 형성한 곳이었다.
"분지 지형인 울란바토르의 주변부는 원래 민둥산이었어요. 그런데 이곳으로 유목민들이 몰려들면서 게르가 빽빽하게 밀집한 지역으로 바뀐 겁니다. 막상 가보니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시설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끝없이 들어선 게르 촌으로 인구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났지만, 학교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상하수도 시설도 없어서 우물물을 길어 먹고 있었어요. 거기에 사회복지시설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지요.
드림센터에서 게르 촌의 모든 문제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학교를 대신할 대안교육부터 손을 댔어요. 주민간담회를 거쳐 어린이들의 유치원 역할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입니다. 그리고 게르 촌이 너무나 광범위해 저희가 다 커버할 수 없는 형편을 감안해 이동식 게르 도서관을 운영했어요. 한 달은 이 지역, 다음 달은 저 지역 하는 식으로 이동하면서 아이들의 교육은 물론, 돌봄 기능까지 맡았습니다."
몽골에서의 활동은 신 대표에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나중에 책방을 열면서 환경 분야의 책에 각별한 관심을 쏟은 계기가 됐다.
"몽골은 겨울철 기온이 보통 영하 20도 안팎인데, 이상기후로 한파가 잦아지면서 유목민이 기르던 가축들이 대거 죽는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유목민들이 빈털터리가 돼 게르 촌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니 기후변화가 해수면 상승 같은 현상뿐 아니라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이 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주로 돌아와서도 상괭이 보호 활동이라든가 유엔 바다의 날 캠페인 활동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몽골에서의 봉사활동을 1년간 하고 제주도로 돌아온 신 대표는 또다시 NGO 활동을 이어간다. 이번엔 제주도의 국제개발협력단체에 들어가 세계시민 교육, 제주 가치 지키기 운동, 그리고 스리랑카에 제주도 관광모델 적용 연구 등에 참여하게 된다. 2년간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스리랑카에 출장을 가서 현지조사와 보고서 발간 등의 작업을 했다.
국내외 봉사활동의 경험을 쌓은 신 대표는 이번엔 기업 사회공헌팀에 들어간다. NGO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피로감이 쌓이고, 한정된 자원으로는 현장에서 쓰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돈 많은 기업에 가서 필요한 곳에 분배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지만 결과는 실망이었고, 새로운 모색을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지구시민을 위한 동네책방 '어나더페이지'
▲ 환경분야 진열대 환경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지닌 신 대표는 코끼리 똥으로 만든 재생종이 그림책을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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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9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어나더페이지'라는 작은 동네책방이 문을 열었다. 신 대표는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큐레이션 책방을 지향했다. 새로 출판되는 책의 서평이나 내용을 꼼꼼히 살펴 서가에 진열할 책을 선택한다. 환경, 로컬, 다양성을 주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이해하며, 소수자가 배제되지 않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 커다란 방향성이다. '지구시민을 위한 동네책방'이란 애칭에 어울린다.
"제가 경험했던 지구환경에 대한 이슈들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챙기고 있고, 제주 신화나 해녀문화 같은 제주지역에서 사라져가는 가치들을 다룬 책, 그리고 여성, 장애자, 성 소수자, 난민, 이주민 등과 관련된 책으로 세분화해서 진열하고 있습니다."
어나더페이지의 서가를 살펴보니 이색적인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코끼리 똥으로 만든 재생종이 그림책 <똥으로 종이를 만드는 코끼리 아저씨>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돼 있다. 그 옆에는 '나무를 베지 않은 착한 종이 코끼리 똥 종이노트'를 팔기도 한다.
공정무역 관련 제품도 눈에 띈다. 멕시코 원주민이 만든 동물인형, 페루의 수제 볼펜, 네팔의 양모제품, 아프리카 가나에서 코끼리 풀로 만든 셰이커 등의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이밖에도 수제 열쇠고리와, 작은 손지갑, 아프리카 전통 악기 등도 팔고 있다. 이 제품들은 생산지의 여성협동조합에서 만든 것들로, 조합원 명의의 통장을 개설하고 조합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게 할 것 등을 요구한 공정무역 활동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입하게 됐다고 한다.
▲ 공정무역 제품을 설명하는 신의주 대표 어나더페이지에서는 책 이외에도 멕시코 원주민이 만든 동물인형, 페루의 수제볼펜, 네팔의 양모제품 등 생산지 여성협동조합에서 만든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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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약 100여 개의 책방이 있고, 그중 70여 개가 이른바 동네책방이다. 시내에서 떨어진 마을에 위치하고 규모는 작지만 책방마다 나름의 특징을 갖고 있다. 참고서나 학습서를 취급하지 않는 대신 책방지기가 나름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엄선한 책을 진열대에 올린다.
동네책방은 책을 파는 곳이지만 한편으론 지역의 문화거점 혹은 사랑방 같은 역할도 한다. 독서모임을 운영하거나, 저자나 작가를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행사도 열고,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런 동네책방엔 지역주민은 물론, 관광객들도 찾아온다. 최근엔 동네책방을 순례하는 여행자들도 생겨나고 있다.
어나더페이지 역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역주민과의 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책을 판매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서귀포시에 소재한 책방들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책방데이로 정해 작가초청, 제주어 퀴즈, 드로잉클래스 등의 행사를 했어요. 책방 문턱을 낮추자는 의도였습니다. 또 매월 마지막 금요일엔 심야책방이라고 해서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이주민 초청, 슬기로운 제주생활, 핫핑크(돌고래 보호단체) 코너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고요.
그리고 작은 서점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상주작가 프로그램도 진행했어요. 작가가 6개월간 머물면서 서점에 출근해 글쓰기 수업 등 다양한 문학프로그램을 맡아주었는데, 지역주민들이 많이 찾아와 주었습니다. 은희경 작가, 김훈 작가 초청행사도 공동기획으로 열었고, 지난 1월 말에는 <우리는 부탄에 삽니다>라는 책의 저자인 세 명의 여성을 초청해 북 토크 행사도 했습니다.
▲ 어르신 그림책방 서귀포시 서부종합사회복지관과 연계해 마을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나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해 그림책으로 출간한 프로그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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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동네책방이 당면한 고민거리가 수익성 문제다. 어나더페이지 역시 예외는 아닐 듯하다. 신의주 대표는 '겨우 적자를 면하는 정도'로 '그냥저냥' 꾸려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 완전 도서정가제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세한 동네서점으로서는 인터넷 서점이나 대형서점처럼 10∼15% 할인을 하면 생존이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동네책방이 단순히 책을 소비하는 곳만이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 상주작가 문학프로그램 작은서점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 작가가 6개월간 머물면서 서점에 출근해 글쓰기 수업 등 다양한 문학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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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 대표는 이름부터 특별한 내력을 갖고 있다. 황해도 평산이 고향인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피란 중 국군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가 풀려난 후 제주에 정착했다. 이 할아버지가 평생 고향을 그리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중에 그가 태어나자 아버지가 통일의 염원을 담아 '신의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책방을 시작한 지 만 3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당초의 기대치에 얼마나 다가갔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욕심도 없었고 책 생태계도 잘 몰랐기 때문에 하루에 한 권만 팔면 된다고 간단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루에 한 권 팔아서는 절대로 존립할 수가 없지만, 아직도 이런 비현실적인 목표를 버리지는 않고 있어요. 그리고 이 책방이 주민들과 소통하는 사랑방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바람 역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느 정도 역할은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지만, 책방 일과 관련되는 여러 활동으로 공부할 틈이 없어 휴학한 상태입니다. 매우 아쉽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어떻게든 복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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