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은 여전히 정수빈의 무대다
'잠실 아이돌'은 졸업했다. 하지만 여전히 잠실야구장 외야는 정수빈의 무대다. 두산 베어스 중견수 정수빈(33)이 환상적인 수비쇼를 이어가고 있다.
정수빈은 현재 KBO리그에서 가장 좋은 '수비수'다. 통계 사이트 스탯티즈에서 제공하는 조정 평균 대비 수비 기여(WAA, 0.497)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WAA는 많은 수비를 하는 선수가 높게 평가된다. 그래서 공이 많이 오는 유격수가 유리하다. 정수빈도 데뷔 이후 한 번도 1위에 오른 적이 없다. 정수빈은 "내가 뭘 했나"라면서도 "외야수비는 항상 자신있다. 어떤 타구든 잡고 싶다. 나이 걱정을 하시지만 전혀 문제 없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지난 주말 잠실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3연전에선 정수빈의 수비 쇼가 펼쳐졌다. 정수빈은 발등 부상 때문에 12일 경기 선발 라인업에서 빠졌다. 대수비로 들어간 정수빈은 3-1로 앞선 8회 1사 2루에서 고종욱의 안타성 타구를 전력질주해 따라간 뒤 몸을 날려 잡아냈다. 경기 흐름을 완전히 바꾼 장면이었다. 14일 경기에서도 두 번이나 2루타성 타구들을 걷어냈다. 외야수들이 잡기 힌든 머리 뒤로 날아가는 타구였지만 척척 잡아냈다.
슬리퍼를 신은 정수빈의 발등은 부어 있었지만 "그는 할 수 있다. 참을만하다"고 했다. 경기 뒤 만난 포수 양의지는 "수빈이 덕분에 20분은 더 수비를 해야했을 거다. 정말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라며 칭찬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올해 수비상을 신설한다. 이대로라면 정수빈의 수상 가능성은 충분하다. 정수빈도 "욕심이 난다. 내 가치는 수비에서 나오기 때문에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고 뛴다"고 했다.
'수비만' 잘 하는 게 아니다. 정수빈은 올해 두산 공격 첨병 역할을 맡았다. 이승엽 두산 감독은 정수빈에게 붙박이 1번 타자를 맡겼다. 타율은 0.264지만, 출루율은 0.382로 팀내 1위다. 조정 득점 창출(wRC+·111.8)로 최근 5년간 가장 좋다. 도루 8개를 기록한 위협적인 주자이기도 하다.
평소 타격폼을 자주 바꾸던 편인 정수빈은 올해야말로 한 가지 자세를 끝까지 유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즌 초반 변화를 줬다. 정수빈은 "전지훈련 때 손목을 세워 '점'으로 공을 맞추려 했다. (더 힘있는 타구를 날리기 위해)손목을 세웠다. 그러나 잘 안 맞을 때는 슬럼프가 길어졌다. 지금은 방망이를 살짝 눕혀서 '면'으로 치는 느낌이다. 기복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이유는 자신의 역할 때문이었다. 정수빈은 "예전엔 1번도 쳤지만, 하위타순도 많이 들어가서 공격적으로 치려고 했다. 올해는 1번에 고정됐다. 거기에 맞게 공을 오래 보고, 칠 타이밍에 조금 더 기다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볼넷이 늘어났다"고 했다. 이승엽 두산 감독이 정수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정수빈은 데뷔 초부터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앳띤 얼굴에서 과감한 플레이를 아끼지 않아 '잠실 아이돌'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젠 팀에서 고참급이 됐다. 이젠 '잠실 아이돌'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친다. 입단 동기 허경민은 주장을 맡았고, 정수빈은 야수조장이 됐다.
정수빈은 "힘든 건 없다. 더 책임감 있게 잘 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나 경민이, 의지형, (김)재환이 형, (양)석환이가 잘 해야 후배 선수들이 따라온다"며 "아직은 어린 선수들이 플레이에 부담을 갖는 거 같다. 어릴 때는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부담은 우리가 질 테니, 잃을 것 없다는 마음으로 더 자신있게 했으면 한다"고 후배들을 독려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두산은 변화가 많았다. 포수 양의지가 4년 만에 돌아왔고, 이승엽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정수빈은 "의지 형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과 안정감이 있다. 의지 형에게 기댈 수도 있고. 해줄거라는 기대감도 있다. 부담이 되겠지만, 잘 이겨낼 것"이라 기대했다.
이승엽 감독에 대해선 "감독님과 대화를 자주 나눈다. 나 뿐 아니라 선수들을 믿어주시는 것 같다. 부담을 줄여준다"고 했다. 이어 "농담을 자주 하신다. 한 번씩 야구가 안 될 때는 '(그렇게 하면)안 돼 너'라고 한다. 김태형 감독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편이라면, 이승엽 감독은 선수들에게 시간도 주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두산은 2015년부터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세 번 우승했다. 매년 선수 유출이 있어 '어렵다'는 평가를 받아도 저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지난해엔 9위에 그치면서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정수빈은 "많이 했으니까 1년 쉬었다고 생각한다. 선수들 빠지면서 약해진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올 시즌 출발이 나쁘지 않다. 15일 현재 5위(17승 1무 16패)를 달리며 중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정수빈은 한국시리즈 MVP(2015년)을 차지하는 등 가을만 되면 힘을 내 '정가영(정수빈은 가을의 영웅)'이란 별명도 있다.
정수빈은 "사람마다 리듬이 있지 않나. 시즌 초반에 잘 하는 사람도 있고. 중간부터 점점 올라가는 선수도 있다. 나는 천천히 올리는 편"이라며 "5위 안에만 들면 (가을에)우리가 강해지니까"라며 또 한 번 높은 곳까지 올라가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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