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㊸] 벼락 맞은 감나무, 당신의 뿌리는 건강합니까 '종이달'

홍종선 2023. 5. 1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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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종이달' ⓒ연출 유종선·정원희, 극본 노윤수, 채널 Genie TV · TVING, 편성 ENA

드라마 <종이달>은 인생에 관한 우리의 가치관을 묻는다. 점잖게 묻는 게 아니라 얄궂게, 예민하게 ‘시험’한다.


주인공 유이화(김서형 분)는 어릴 적부터의 친구 강선영(서영희 분)의 표현하듯 ‘이상하게 따뜻한’ 사람이다. 오랜 친분이 없는 사람이어도, 길 가다 방금 본 어린이여도, 심지어 나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어도 그 상대에게서 어떤 안쓰러운 지점을 발견하면 마음을 주고 도움을 준다. 이상한 건 남편(공정환 분)에게는 차갑다, 아내로서의 업무는 완벽하게 수행하지만, 더 이상한 건 그 도움을 주느라, 자신한테 쓰려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저축은행 직원인 유이화가 고객의 돈을 횡령한다.


<종이달>은 묻는다. 유이화는 누구보다 측은지심이 강한 좋은 사람입니까. 재산이 어디에 얼마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의 재산이거나, 돈을 위해서라면 손자의 장기도 매매할 수 있는 사람의 차명 재산이거나, 애초 문제 있는 돈이라 도둑맞고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는 돈이면. 그 돈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보다 나은 일에 쓰이는 것이라면(일테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신예 감독을 지원하거나 남자친구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를 돕는 것이라면), 이타적인 사람의 도둑질은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


물론 죄다. 명백히 죄다. 그런데 그 당연한 답을 쉽게 뱉지 못하게 우리를 테스트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게다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우리는 ‘선’을 넘은 적이 없던가. 내가 댔던 핑계에 비하면 유이화의 횡령 사유는 적어도 덜 이기적이다.


류가을 역의 배우 유선 ⓒ

강선영은 친구 류가을(유선 분)과 옆집에 붙어산다. 류가을은 모두에게 후하다. 우선 자신에게 후하다. 수백만, 수천만 원짜리 명품을 자신에게 척척 사 입힌다. 고가의 신상들이 가득한 집을 선영이 수시로 드나들며 제 것처럼 쓰게 한다. 이혼 후 재혼한 아빠(이천희 분)와 사는 고등학생 딸(유채희 분)에게도 명품을 쓸어 담아서 사준다. 부서 회식이 아니라 신입 직원이 후원하는 영화 현장에도 회식을 ‘쏜다’. 언제나 카드를 척척 낸다. 때로 한도 초과가 뜨고 연체로 결제가 막히는 일이 있으면 ‘외상’으로라도 쏜다.


<종이달>은 묻는다. 류가을은 넉넉하게 베풀 줄 아는 인심 좋은 사람입니까. 어떻게든 감당이 되는 거라면, 잠깐 왔다 가는 소풍 같은 인생 ‘폼나게’ 사는 멋진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내 주변에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은 내 친구 삼고 싶고, 내 선배 삼고 싶은 ‘인격녀’기도 하다. 나이 들수록 지갑을 잘 여는 게 인격이라 하지 않는가.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게 아닌 걸 생각하면, 류가을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두둔하고 싶어지는 순간. <종이달>이 얄궂게 ‘과거’를 들춘다. 류가을은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집, 내가 사고 싶은 것도 맘대로 살 수 없는 집’에서 뛰쳐나갔다. 엄마 없으면 못사는 딸은 또다시 엄마를 잃을까 봐, 바람피우는 아빠 때문에 새엄마(이가령 분)마저 집을 떠날까 봐 온갖 정성을 들인다. 자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엄마, 드라마는 우리가 류가을을 마냥 부러워하게 놔두지 않는다.


강선영 역의 배우 서영희 ⓒ

강선영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질 상황임에도 부유한 타운하우스에서 산다. 어른들의 사회적 인간망이 어린 시절 형성된다는 지론에 따라, 자식 교육을 위해 무리했다. 전업주부인 선영은 ‘아끼는 게 돈 버는 일’이라는 철칙으로 생활한다. 전깃불 끄고 생활하고 타임세일 때 장 보는 건 기본. 남편(윤희석 분) 회사 모임에 가거나 자존심 좀 세워야 하는 자리에 갈 때는 친구의 드레스룸을 쇼핑몰 삼아 온몸을 휘감는다. 부촌에서 버려지는 옷들을 수선해서 딸에게 입힌다.


<종이달>은 묻는다. 강선영은 가족을 위해 알뜰살뜰 사는 좋은 사람입니까. 남편 회사 파티에서 남은 음식을 죄다 싸 오는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 망신당할 위기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어 ‘친환경 인플루언서’로 거듭난 선영은 이제 소위 잘나간다. 돈이 되는 구독 수와 ‘좋아요’에 목숨 걸다 보니, 새 제품을 ‘한 달 후기’용으로 조작하느라 멀쩡한 내용물 일부를 버리고 중고품으로 만든다. 지지리 궁상이고 염치없긴 해도 세 친구 중에 가장 평범하게 행복하게 산다 싶어 응원하고 싶었던 선영을 <종이달>은 망가뜨린다.


유이화 역의 배우 김서형 ⓒ

도대체 누구처럼,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남의 돈으로 남을 돕는 것은 범죄이고,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는 줄도 모르고 펑펑 쓰는 건 이기심 가득한 허세고, ‘돈, 돈’ 하다간 돈에 먹혀 왜 돈을 아끼고 돈을 벌려 했는지를 잊은 건 못난 짓이다.


물론 ‘이렇게 살면 안 된다’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드라마 <종이달>은 한 발 나아간다. 보다 직접적으로 삶에 관한 가치관, 바람직한 인생관을 피력한다.


‘세 친구가 무엇을 놓쳤길래’ 나름 주변을 돌아보며 따뜻하게 살고 싶었던 이화가, 인색하게 굴지 않고 후하게 나누며 살고 싶었던 가을이가, 한 푼이라도 아껴 자식의 인생만큼은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었던 선영이가 현주소에 이르렀는지 선명하게 일갈한다. 그나마 돌아갈 길이 가장 가까워 보이는, 그 위대한 ‘평범한 삶’에서 가장 덜 떨어져 걷고 있는 강선영-제국 부부의 입을 통해 말한다. 꽤 아프다.


벼락 맞은 감나무가 전하는 이야기 ⓒ 출처=네이버 블로그 sunlin77


선영: 우리 이사 가자, 그럴 거지? 일도 관두라고 할 거지, 수준대로 살라고 할 거지?


국: 싫다고 할 거지?

우리 집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벼락 맞은 가지에 불이 붙었어. 금방 껐지. 다 괜찮은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시들더니 죽었어.


선영: 왜? 불은 금방 껐다며.


국: 뿌리가 썩어가고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대. 눈에 보이는 불만 껐지.


선영: 그걸 왜 몰랐대?


국: 가지만 무성하고 잎만 안 떨어지면 괜찮은 줄 알았으니까.

선영아, 우리도 저기 어디서부턴가 썩고 있는 건 아닐까?


뿌리가 썩었을 때 죽지 않는 방법은… 10화 유이화의 대사에 있다 ⓒ

가지 무성하고 잎도 많다고 뽐내며 살진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살피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내 삶의 뿌리는 썩지 않았다고, 내 마음의 뿌리는 ‘선’과 ‘정의’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이나 행동이 어쩌면 멀고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저기 어딘가가 썩어서 나온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거나 인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신의 뿌리는 건강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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