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참여자인 엄마와 함께 광주를 찾았습니다

김보예 2023. 5. 15.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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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광장에서 떠올린 그날의 기억... 역사는 간절히 기억하는 자에 의해 쓰여진다

[김보예 기자]

지난 13일, 정말 오랜만에 광주광역시를 찾았다. 올해 광주를 찾은 이유는 안 다녀오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에서 약 7년 동안 박사과정 유학을 했다. 공부에 매진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잘 오지 않았다. 해외에 있다는 이유가 매년 5월마다 나에게 핑계가 되어 주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 감사하게도 나는 바로 대학강사로 채용되어 강단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봄 학기 수업은 또다시 나에게 5월의 핑계를 제공해 주었다. 핑계가 한 해 한 해 늘어갈 때마다, 광주와 나도 한 뼘 한 뼘 멀어졌다.

문득, 나는 광주와의 거리가 두려워졌다. 정확히는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엄마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참여자이자, 피해자이다. 광주에 대한 외면이 엄마에 대한 외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과연 좋은 딸인가?' 박사학위(교육학)와 대학교수(강사)라는 허울 좋은 외면에 취해, 정작 엄마의 아픔은 모른 척하고 있는 나쁜 딸은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 늦지 않게 광주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13일 나는 엄마와 함께 광주를 찾았다.
 
▲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문화제 2023년 5월 13일(토), 1980년 오월의 광주정신을 기르기 위해 5·18민주광장에서 문화제가 열렸다. 문화제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 김보예
  
▲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 민족·민주화 성회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교수단을 필두로 하여 광주시민들이 모여, 신군부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였다. *본사진은 '광주5·18국립묘지 주차장 매점 옆 사진전시관'에 전시된 사진을 재촬영한 것입니다*
ⓒ 김보예
   
그날 나와 엄마는 옛 전남도청이 있던 자리에 설립된 5·18민주광장(문화전당역)을 찾았다. 마침, 5·18민주화운동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무대가 설치된 곳은 1980년 5월 14일~16일 민족·민주화 성회가 열긴 분수대 자리이다. 민족·민주화 성회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교수단이 필두가 되어 광주시민들과 함께 신군부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였다. 그 시각(5월 14일 09:00), 특전사도 출동 준비를 완료하였다.
 
▲ 5월 27일 도청을 사수하려던 시민들의 주검 옛 전남도청 앞 광장은 광주5·18민주화운동의 근원지였다.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을 사수하고자 노력했으나, 주검으로 돌아왔다. *본사진은 '광주5·18국립묘지 주차장 매점 옆 사진전시관'에 전시된 사진을 재촬영한 것입니다*
ⓒ 김보예
 
1980년, 학생이었던 엄마는 옛 전남도청(현, 518민주광장)에서 걸어서 약 20분 거리에 살았다고 한다. 엄마는 늘 전남도청 앞 지나서 등교했다며,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내놓으셨다. 평범한 등굣길이었던 전남도청 앞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민들의 시신들로 가득 메워졌다. 죽은 동지를 위해 시민들은 관과 태극기를 구해왔다. 하지만, 관과 태극기의 수는 한없이 부족했다.
죽은 이들은 넘쳐났고, 전남도청 앞을 비롯하여 전남대·조선대 병원 주차장까지 시신이 눕혀졌다. 유가족들이 시신을 찾을 수 있도록, 시민들은 죽은 이의 가슴팍에 검은 매직으로 이름 혹은 유언(죽기 전 마지막으로 외친 말)을 적어 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은 이의 수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많아졌다. 주검으로 돌아온 열사들은 5월의 뙤약볕 아래, 옛 전남도청 앞 광장과 병원 주차장에 피로 물든 옷으로 덮여진 채 줄세워졌다. 문화제는 열사들의 시신과 정신이 놓여졌던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의해 절명한 임산부(임신 8개월)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만삭의 임산부는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가슴을 맞고 절명하였다. 주민들은 태아라도 살리기 위해 계엄군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을 부탁했으나, 계엄군의 폭력으로 주민들은 부상을 당하고 태아는 사망했다. *본사진은 '광주5·18국립묘지 주차장 매점 옆 사진전시관'에 전시된 사진을 재촬영한 것입니다*
ⓒ 김보예
   
계엄군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공격했다. 임신 8개월 최미애 님은 만삭의 배를 보듬고 집 앞 골목길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다가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가슴을 맞고 절명했다. 그러나 뱃속의 태아는 살아있었다. 동네 주민들은 그녀의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 길을 막고 있는 계엄군에게 길을 비켜주길 간절히 애원했다.
 
"임산부는 죽었으나 아직 뱃속의 태아는 살아 있다. 지금 병원으로 데려가면 태아는 살릴 수 있으니 비켜달라"

-광주518국립묘지 주차장 매점 옆 사진전시관-
 
그러나 계엄군들은 대답 대신 곤봉으로 주민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렇게 뱃속의 태아는 약 15분간 발길질하다가 숨을 멈추었다.

사상자만큼 부상자도 상당했다. 광주에는 계엄군 26개의 부대가 내려왔다. 무명 열사들의 치료를 위한 혈액 공급이 시급했다. 시민들은 자진해서 헌혈차에 올랐다. 여학생이었던 엄마도 집 앞에 온 헌혈차에 올랐다고 했다. 출산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옆집 아주머니도 함께 헌혈차에 오르셨다고 한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은 줄을 이었다.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광주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했고, 주먹밥으로 무명 열사들의 투쟁을 독려했다. 엄마도 시위대(5·18민주항쟁 운동가, 무명 열사)를 위한 주먹밥을 만들었다고 했다. 공권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광주시민들은 강도나 약탈은 물론 사재기도 하지 않았다. 시민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민주화를 위해 묵묵히 나아갔다. 오는 2023년 5월 18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는 주먹밥 나눔 행사가 열린다. 주먹밥으로 하나 된 5월의 광주 정신을 기르기 위한 행사이다.
 
▲ 제43주년 518만주화 주먹밥 나눔행사 일시 : 2023년 5월 18일(목)장소 : 국립518민주묘지
ⓒ 김보예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의 암호명이었다. 무력 진압을 화려함으로 포장하고, 시민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휴가'로 희석한 암호명. 계엄군에는 초여름 밤의 꿈같은 순간이라는 망각을, 작전을 명령한 전두환 자신에게는 진실로 화려한 업적이 될 거라는 착각을 담은 암호명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 5월 18일~27일까지 10일간의 항쟁 기간 동안 발생한 사망자·부상자·구속자·행방불명자는 약 6천명이다. 하지만 여전히 광주5·18민주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은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고 상황이다.

나는 매 학기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아래의 질문을 던진다.

"역사는 누구에 의해 쓰여진다고 생각하나요?"

대부분의 대중들은 역사는 강자 혹은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거짓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역사는 간절히 기억하는 자에 의해서 쓰여집니다."
 
▲ '기억하라' 오월정신 리본 달기 행사 국립518민주묘지 주차장을 가득 매운 '기억하라' 오월정신 리본.
ⓒ 김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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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교육학 박사, 고려대/국민대 강사입니다. 참고문헌 사단법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1980년 오월이야기』 오승용·한선·유경남(2012)『5·18 왜곡의 기원과 지실』 (사)5·18민주유공자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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