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져도 살아가는 그들을 위해"...신경숙, 작별을 이야기하다
"헤어지면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상황에 부닥칠 때가 있어요. 이제 만남보다 작별이 더 많은 나이잖아요. 하지만 누구나 그런 시간을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작별은 공평하죠."
작가 신경숙이 소설집 『작별 곁에서』(창비)로 돌아왔다. 2021년 장편『아버지에게 갔었어』 이후 2년 만이다.
중편 길이 세 편을 묶은 연작 소설집이다. 맨 앞에 배치한 '봉인된 시간'은 미국에 파견된 엘리트 장교의 아내였다가 불법체류자로 전락해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이야기. 그다음 실린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의 화자는 암 투병 중인 친구의 연락을 받고 무작정 친구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표제작 '작별 곁에서'는 딸을 잃고 방황하던 화자가 다시 생의 의지를 되찾는 과정을 그렸다.
11일 인터뷰에서 신씨는 "부서진 그 자리에서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소설"이라고 새 소설집을 소개했다. 세 편 모두 갑작스럽게 의도치 않은 작별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의 사연을 편지 형식으로 담아냈다. "작별을 겪으며 부서진 사람들이 마음껏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서간체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세 편의 중편이 각각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작별이라는 키워드로 가느다랗게 연결된 장편으로 읽히길 바란다"라고도 했다.
표제작인 '작별 곁에서'는 제주가 탄생시킨 작품이다. 비극적인 근현대사는 개인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신씨는 "몇 해 전 제주도에서 체류할 때 잠시 집 밖에 나갔는데, 한적한 동네가 골목마다 자동차로 꽉 차 있었다. 한 마을 주민들이 한날한시에 몰살돼 앞집 아버지, 옆집 작은아버지 제삿날이 모두 같다 보니 자손들이 한꺼번에 몰렸던 거다. 제주도에 들꽃처럼 널려 있는 사연이다"고 했다. 그는 "일부러 찾지도 않았는데 어디에나 방치된 묘지를 만났고 '모두가 사망했다'는 문장을 읽기도 했다"며 "살아서 숨 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쓴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별 곁에서'의 화자는 딸을 잃고 수년을 방황하다 제주에서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이때 화자에게 제주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생의 의지를 불어넣는 존재가 '유정'이라는 인물이다. 신씨는 "부서진 사람의 과거를 보듬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유정이 한다"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의 이웃, 누구나 유정 같은 사람 한 명쯤 곁에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고 했다.
소설 메시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라서일까. 유정은 '선생님' '화가' '나' '너' 등 일반명사와 지시대명사로만 호명되는 소설 속 캐릭터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을 갖는다.
신씨에게 '유정'을 만드는 일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인간의 선의에 대해 기록하는 순간이 작가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서다.
'봉인된 시간'은 작가가 오래전 뉴욕에서 체류할 때 인연을 맺었던 한 시인이 화자다. 시인은 장교이자 외교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뜻하지 않은 근현대사에 연루돼 모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인물이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암살한 초유의 사건으로 '암살자'의 비서실장 출신이었던 남편은 변절자로 낙인 찍히고, 부부는 조국에서 버림받은 유배자가 된다.
신씨는 "2010년 뉴욕에서 그분을 만났다. 시인으로서 오랜 시간 모국어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온 나를 하나의 인간이 아닌 '모국어'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비극적인 근현대사보다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모국어를 잃게 된 시인의 삶, 먼 나라에 정착해야만 했던 여인의 삶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수십 년 동안 한국 문학 정상에 있었던 신씨는 독자들에게 이런 말이 하고 싶다고 했다.
"내 나라말을 읽고 싶어서 유학길에 『외딴방』을 가져갔다는 젊은 학생이 기억에 남아요.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떤 독자가 내 책을 읽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가득 찹니다. 이 책으로 작별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보듬어줄 수 있길, 당신이 사랑한 것과 온전하게 작별할 수 있길 바랍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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