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 주춤한 에르도안 '종신집권' 야망, 2주 뒤 운명 갈린다

이유정 2023. 5. 1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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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15일(현지시간) 수도 앙카라에서 그가 전날 대선 투표에서 선두를 달리는 것으로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튀르키예(터키)의 철권 통치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9)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에서 고전하는 것으로 나오면서 그의 장기 집권 가도에 균열이 일고 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지지율 득표에 실패한 에르도안 대통령과 2위의 야권 후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는 오는 28일 결선투표로 승부를 가리게 됐다.

국영 아나돌루 통신에 따르면 15일 오후 개표 99.87% 상황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49.50%를 득표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44.89%)를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양측 모두 1차 선거 승리 요건인 50%를 넘지 못 했다. 튀르키예 최고선거관리위원회의 아흐메트 예너 위원장은 기자들에게 “28일 에르도안 대통령과 2위 후보 간에 대선 결선투표가 치러질 예정”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군소 후보인 시난 오간은 5.17%, 대선 사흘 전 후보에서 사퇴한 무하렘 인제는 0.44%로 집계됐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 역시 개표 99%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이 주도하는 연합이 49.46%를 얻어 야당의 CHP 연합(35.02%)을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그간 여론조사상으론 야권 6개 정당 단일 후보인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에르도안을 소폭 제친 것으로 나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반대 결과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개표가 진행 중인 15일 새벽 지지자들 앞에서 “우리가 다수를 얻었고 확실하게 상대방을 따돌렸다”면서도 “2차 선거를 수용하겠다”며 결선투표행을 인정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의회제에서 대통령제로 전환한 2018년 6월 첫 대선 당시엔 53%를 얻어 2위 후보(31%)를 20%p 넘게 따돌린 바 있다.


지진 지역 지키고 3대 도시 내줬다


타이이프 레제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대선 하루전날인 13일(현지시간)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성소피아)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애초 지난 2월 튀르키예 남부를 강타한 강진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불리할 것으로 전망됐는데, 막상 개표 결과를 보면 지진 지역에서 타격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 양상이다. 지진의 진앙지인 카흐라만마라슈와 인근의 가지안테프, 오스마니예, 킬리스, 샨리우르파주에서 모두 에르도안 대통령이 선두를 차지했다.

다만 한국 구호대가 활약했던 하타이 지방과 아다나, 메르신주 등은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이 지역들은 2018년 6월 대선에선 모두 에르도안 대통령이 휩쓸었던 지역인데 민심이 뒤집혔다.

나아가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이즈미르 등 튀르키예의 3대 대도시가 클르츠다로을루에게 넘어갔단 점도 에르도안으로서는 뼈아픈 대목이다. 이즈미르를 제외하곤 지난 선거에서 에르도안이 이긴 곳인데 심판을 받은 셈이다.

한편 에르도안 대통령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에 15일 이스탄불 보르사 증시는 개장 전 6.38% 급락했다. 이에 증권거래소는 주식 시장 전체 거래를 일시 중단하는 서킷 브레이커를 발동했다.


킹 메이커 부상한 4위 후보


튀르키예의 강성 민족주의 정당 연합인 선조연합 대선 후보로 출마한 시난 오간. AP=연합뉴스
미국 CNN과 로이터통신 등은 1차 투표 결과에서 5%대 득표를 한 시난 오간이 일약 ‘킹메이커’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에르도안과 클르츠다로을루의 격차가 5% 미만인 만큼, 그가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가 최종 승패를 가를 수 있어서다. 강성 민족주의 성향의 오간 후보는 대선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3위 후보인 인제보다 뒤처지는 군소 후보에 불과했다.

오간은 15일 성명을 내고 “튀르키예의 민족주의자들이 이번 선거의 핵심을 차지하게 됐다”면서 “우리는 지지 선언에 대한 요구 조건을 제시할 것이며, 결선 투표에서 우리나라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오간이 속한 선조연합은 극우 성향을 띄는 정당들이 연합한 만큼 에르도안 대통령과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의회제 회귀 주장 등 일부 정책에선 에르도안 측과 각을 세우고 있다. 오간이 강조하고 있는 시리아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은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도 공약으로 내건 부분이라 접점이 가능하다는 평이다.


“튀르키예 역사 결정할 2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가 14일(현지시간)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UPI=연합뉴스
이에 따라 오는 28일 결선투표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됐다. 다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부의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어 영향이 적잖을 전망이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10GB 무료 인터넷 제공, 70만명에 달하는 공공부문 근로자 임금 인상, 수입 곡물 관세 130% 부과 등과 같은 정책이 대표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를 놓고 “군함(에르도안)과 양파(클르츠다로을루)의 싸움”이라고 묘사했다.

올해 10월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현대 튀르키예 건국 100년째를 맞는다는 점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강한 지도자론’을 적극 부각시키고 있다. 경쟁자인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이슬람 소수 종파인 알레비 출신이자 쿠르드계라는 점도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튀르키예 유권자의 절반 가량이 수니파 무슬림이란 점을 노린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선거를 하루 앞둔 13일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성소피아) 사원에서 기도를 올리는 모습으로 이슬람 보수 민족주의자들의 표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정세 분석가인 하칸 아크바스는 로이터통신에 “향후 2주는 튀르키예 역사상 가장 긴 2주가 될 것이며, 이스탄불 증권거래소의 급등락을 비롯한 많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에르도안 동맹이 야당보다 나은 결과를 얻은 상황이기 때문에 결선투표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통신사 AFP는 “유권자들이 ‘내가 아는 악마’(나쁜 것을 알지만 확실한 선택지)를 선택한다면 에르도안이 정권을 연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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