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대부'의 연습생 성착취 파문…日 연예기획사 공식 사과
사실 인정은 사실상 회피
일본 대형 연예기획사 쟈니스 사무소가 전 사장인 고(故) 쟈니 키타가와로부터 소속 연습생과 탤런트들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의혹에 대해 14일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소속사가 사과와 별개로 성추행 사실에 대한 인정은 회피하면서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십 년 동안 성범죄를 은폐했던 정황도 밝혀지면서 팬들을 중심으로 불매 운동도 벌어지는 상황이다.
15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전날 후지시마 줄리 케이코 쟈니스 사장은 본인이 출연해 사과하는 동영상과 서면 사과문을 공개했다. 1분짜리 영상에서 그는 "무엇보다 먼저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분들에게 깊이 사죄드린다"며 "관계자와 팬 여러분께 큰 실망과 불안을 드린 점도 거듭 사과드린다"고 사죄했다. 소속사 차원의 공식 사과는 이번이 처음이다.
쟈니스는 '아라시', 'SMAP', '킨키키즈' 등 일본 국민 아이돌을 배출했던 기획사로, 2000년대 한국에서도 쟈니스 출신 아이돌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지난 3월 영국 BBC는 쟈니 전 사장이 위계를 이용해 소속 연습생과 탤런트를 상대로 수십 년간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다만 소속사는 사과와 별개로 사실인정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피했다. 후지시마 사장은 이후 서면 일문일답에서 전 쟈니스 주니어(연습생)들의 피해 호소에 대해 "당사자인 쟈니 키타가와에게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저희가 개별 고발 건에 대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인정하지 않는다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며 "나아가 억측에 의한 비방 등 2차 피해에 대해서도 배려해야 하므로 이해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책임을 회피했다는 일본 언론의 지적이 이어졌다.
후지시마 사장은 향후 재발 방지책으로 소속사 차원의 준법 경영을 위한 '컴플라이언스 위원회'를 발족하고, 사외이사를 영입할 방침도 밝혔다. 그는 "사내의 가치관이나 상식만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은지 외부의 눈으로 지적할 수 있는 사외이사를 영입, 경영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재발 방지 대책에서 쟈니스 소속 아이돌 팬들이 요구했던 제3자위원회를 통한 조사는 제외됐다. 후지시마 사장은 "조사 단계에서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취자 각각의 상황이나 심리적 부하에 대해서 외부 전문가들도 신중히 처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1일 팬들로 구성된 진상조사 요구 단체는 제삼자를 통한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며 1만6125명의 서명을 소속사에 제출한 바 있다.
일본에서는 3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해당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쟈니 전 사장의 성추행은 1990년대 주간문춘이 첫 보도 했으나, 소속사는 오히려 주간문춘을 고발하는 등 맞대응에 나선 바 있다. 이처럼 쟈니스가 대형 기획사로 방송사까지 아우르는 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 은폐가 가능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이 문제를 일본 최대 출판사 고단샤 산하 잡지 ‘슈칸겐다이’에 폭로했었던 모토키 마사히코 기자는 이후 쟈니스 소속사가 "앞으로 고단샤 계열의 잡지는 쟈니스 출신 연예인을 다룰 수 없다"고 통보해 좌천당하기도 했다. 일본 대형 언론사들은 TV 채널도 함께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출연진 섭외 단계에서 쟈니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해당 문제가 주간문춘 등 잡지가 아닌 기성 언론에 보도될 가능성도 낮았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재조명받게 된 것도 결국 영국 BBC가 키타가와 전 사장의 미성년자 성추행 의혹을 다룬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뒤였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비판 여론이 형성된 뒤에야 쟈니스 소속 전 연습생들도 발언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12일에는 연습생 출신 남성이 기자회견을 열고 키타가와의 자택 등에서 여러 차례 걸쳐 성폭력을 당했다고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모토키 기자는 피해 당사자의 폭로가 이어지는 점에 대해 "일본 풍토에서는 10대 중반의 남자가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아이돌로 인기가 많은데 이런 사실을 고백하면 팬이 떠나간다는 공포감까지 뒤섞여 이를 폭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소속사 사장의 사과 이후에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팬들 사이에서는 쟈니스와 쟈니스 소속 탤런트에게 광고를 준 스폰서 기업을 불매하자는 불매 운동까지 일어난 상태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광고하는 것이라도, 일본 아이돌의 생태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불매로 이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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