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 시대 전개…대영 제국과 파운드화의 운명은? [한상춘의 국제경제읽기]
영국 국왕의 대관식은 영연방 국가들의 충성의무를 재확인하는 축제 기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찰스 3세 대관식 직전에 영연방의 대부 격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반란, 즉 자국 국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5호주 달러에 찰스 3세의 문양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과연 영연방 형태로 남은 대영 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연방의 태동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세계 경제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갈 조짐을 보이자 옛 영화를 부활하기 위해 ‘하나의 유럽 구상’이 나왔지만 출발부터 시련이 닥쳤다. 선민의식을 갖고 있는 영국과 이를 반대하는 대륙 간의 역사적 앙금이 재발됐기 때문이다.
독일의 1차 대전 책임과 미국 경제의 대공황 시작으로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의 영화를 되찾는 분위기가 성숙되면서 1931년 영연방이 태동됐다. 다른 지역 블럭과 달리 느슷한 형태의 영연방은 현재 참가국 52개국, 인구 25억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지역협의체이다. 주요 20개국(G20)과 비슷하게 운용된다.
영연방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잠시 전성기를 누리다가 미국 주도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쇠퇴한 곳은 경제 분야다. 2차 대전 이후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와 IMF(국제통화기금)을 양대 축으로 한 세계경제질서가 정착되면서 영연방 국가의 탈퇴 조짐까지 일기 시작했다.
위기 의식을 느낀 영국은 1973년 뒤늦게 유럽 연합(EU)에 가입했다. 두 차례 대전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던 하나의 유럽 구상은 1957년 로마조약을 깃점으로 EU로 재출범한 이후 순조롭게 성장했다. 반면 미국 주도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1972년 닉슨의 금태환 정지선언으로 흔들려 영국으로서는 EU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범 이후 EU는 두 갈래 길로 추진돼 왔다. 하나는 회원국수를 늘리는 ‘확대’ 단계로 초기 7개국에서 28개국으로 늘어났다가 영국의 탈퇴로 27개국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회원국 간 관계를 끌어올리는 ‘심화’ 단계로 유로화로 상징되는 유럽경제통합(EEU)에 이어 유럽정치통합(EPU), 유럽사회통합(ESU)까지 달성해 간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문제는 영국의 EU 가입 당시 독일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EU의 가입을 ‘굴욕이다’라는 자국 국민의 비판과 일부 영연방 국가의 반기로 영국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영국 국민의 자존심인 파운드화 주권을 포기하는 유로화 구상에는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은 데 이어 2016년에는 아예 EU를 떠났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기침체 국면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영국 재무부에 따르면 브렉시트로 자국 경제가 2030년까지 6% 위축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영국 국내총생산(GDP)이 EU에 잔류했을 때와 비교해 2030년에는 5% 위축될 것으로 내다봤다.
국제금융시장의 중심지였던 런던의 위상은 대륙의 변방 금융지로 추락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주식시장은 프랑스 파리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으로, 채권시장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빠르게 이동되는 추세다. 런던 금융시장이 위축될수록 뉴욕 금융시장의 위상은 더 높아지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국제금융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는 프랑크푸르트가 가장 빨리 부상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가장 중요한 독일 경제가 코로나 사태 등과 같은 외부 충격을 잘 흡수하면서 유럽재정위기에서 입증됐듯이 유럽 통합이 흔들릴 때마다 최후의 보루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 신인도 면에서 미국보다 월등히 낫다. 미국은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위험수위를 넘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국가신용등급이 한 단계 떨어진 데 이어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재정지출 남발로 또다시 강등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독일은 재정수지 뿐만 아니라 경상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자체적으로는 증강현실 시대에 국제금융 중심지로 갖춰야 할 필수조건인 클라우드와 핀테크, 블록체인 기업이 집중돼 있고 독일 경제의 자랑이기도 한 막강한 제조업과 컨설팅, 미디어 기업이 뒷받쳐주고 있는 복합도시다. 세계 최대 규모인 무역박람회인 메세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오토쇼, 음악 박람회, 도시 박람회도 매년 열린다.
분데스방크에 따르면 영국에서 활동해온 비독일계 금융기관이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독일 금융시장으로 이전시킬 자산의 규모가 무려 8,170억 달러(약 89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ECB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을 탈출할 것으로 추정한 자산인 1조 3,000억 유로(약 1,718조원)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또 하나의 영국의 자존심이었던 리보(Libor·런던 시중은행 간 금리)는 2021년 말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국제기채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기준금리로 리보금리를 사용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단기물은 ‘미국 재무성 증권 3개월물 금리’, 장기물은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로 사용한다.
조셉 바이너(J. Viner) 등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처럼 경제발전단계가 비슷한 국가끼리 결합하면 무역창출효과가 무역전환효과보다 커 역내국과 역외국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어떤 형태로든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영국의 고립은 남아있는 유럽 국가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다른 회원국 탈퇴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유로존 탈퇴 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던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가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EU 탈퇴 이후 영국 경제가 독자적으로 회생할 경우 회원국의 탈퇴 움직임은 의외로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회원국 내부에서는 분리 독립 운동이 고개를 들 가능성도 우려된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이어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와 근접한 동부 등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회원국 탈퇴가 잇따르고 분리 독립 운동마저 일어난다면 유럽 통합은 붕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아 있는 회원국 경제도 충격이 줄 수밖에 없다. 영국의 EU 탈퇴를 계기로 유럽 경제성장률이 1%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는 예측기관이 대다수다. 크리스틴 라가르도 유중앙은행(ECB) 총재가 금융완화 정책을 계속 추진할 뜻을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유로화 가치도 유로존 출범 초에 보였던 등가수준(1유로=1달러)까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탈리아 천문학자와 물리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극한 상황에서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던진 말 한 마디가 먼 훗날 높게 평가받으면서 '지동설‘이 확고해졌다. 영국의 고립으로 유럽 통합 앞날이 당장은 어두워 보이지만 그 속에서 움트고 있는 새로운 통합의 싹이 태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갈라파고스 함정은 또하나의 고통이다.” 역대 어느 국왕보다 도덕적으로 결점을 많이 갖고 있는 찰스 3세가 고립을 계속 고집하면 대영 제국의 앞날은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과 영연방 국가의 탈퇴가 가속되면서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으로 예상된다. “통합만이 마지막 남은 대영 제국을 유지하는 길이다.”
한상춘/한국경제TV 해설위원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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