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같은 외교, '보리차' 같은 외교[장세정의 시선]

장세정 2023. 5. 15. 00:5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때론 통쾌하고 때론 아슬했던 1년
과도한 혐중, 국익에 부메랑 우려
가치외교 넘어 국익외교 집중을
장세정 논설위원

외교·안보 분야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취임 이후 1년 간 굵직한 의사결정을 많이 했다. 때로는 사이다처럼 통쾌했지만, 때로는 논쟁을 촉발해 아슬아슬했다. 갑론을박이 있겠지만, 국제정치 지정학에 대지진급 구조변동이 발생한 와중에 그런 변화를 인식하고 반영하며 국가안보와 국민 안전을 고려한 불가피한 판단이라고 본다.

국제정치의 역학 구조는 2차 대전 이후 40여년의 냉전 체제, 1980년대 이후 탈냉전 시대, 그리고 지금의 신냉전 체제가 진행 중이다. 미국과 중국은 '너 죽고 나 살기' 식으로 다투고 있다. 러시아가 도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을 포함한 자유 진영과 러시아·중국 등 권위주의 독재 진영의 첨예한 대결 양상이다. 북한 정권은 안보리 상임이사국(P5)의 분열이라는 사각지대를 이용해 핵미사일을 고도화하고 대남·대일·대미 협박을 서슴지 않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앙포토]

이처럼 절체절명의 안보 위기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가 속수무책이거나 상대의 선의만 믿고 공허한 평화 타령을 반복한다면 그야말로 말로 무책임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대북 굴종과 삶은 소대가리' '대중 저자세와 혼밥 굴욕' 등을 비판받은 문재인 정부 시절을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지난 1년간 윤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다소 거칠고 투박했지만, 본질을 따져보면 불가피하고 필요한 선택이 많았다.
북한에 대해 윤 대통령은 '담대한 구상'을 제시하면서 어떠한 무력 도발도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원칙을 천명했다. 북한에 끌려다니며 김정은 정권의 처분을 기다리는 비굴함 대신 힘에 의한 평화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전쟁 위기를 키웠다"고 비난하지만, 그런 주장은 눈앞에 닥친 핵 위협을 애써 눈감아주며 북한을 이롭게 하는 태도다.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미국을 국빈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26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소인수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미국과는 지난해 5월 한·미정상 회담으로 지난 정부 시절에 벌어졌던 불신의 틈을 봉합했고,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한 지난 4월 국빈방문을 계기로 신뢰와 결속을 강화했다. 자체 핵무장까지는 아니지만 핵협의그룹(NCG) 창설을 담은 '워싱턴 선언'으로 국민의 불안감을 상당히 덜어줬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공개 경고처럼 이제 북한은 함부로 도발하면 정권의 종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 대해 윤 대통령이 선제적으로 제시한 강제징용 해법은 해외에서 호평받았지만, 국내에선 냉소적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일본식 오므라이스 맛에 빠져서, 혹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예뻐서 그랬을 리는 없다. 국제질서 급변을 고려하면 문 정부 시절처럼 일본과 계속 척지고 있을 여유가 없다. 한·일 갈등을 풀고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기시다 내각은 윤 대통령이 살려낸 모멘텀을 정치적으로 즐기기에 급급하지 말고 전향적으로 화답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나란히 걷고 있다. 양국 정상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 등을 논의했다.[연합뉴스]

국제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된 푸틴의 러시아에 대해서는 자유 진영과 공조하면서 상황 변화를 봐가며 탄력적으로 대응하면 되겠지만, 진짜 까다로운 상대는 중국이다. 미·중 패권 다툼으로 거칠어진 중국에 대한 반감과 비호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를 생각하면 밉다고 무작정 절연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중국의 존재감을 깡그리 외면하고 눈감는 태도가 국익에 보탬이 될지 따져봐야 한다. 중국 전체를 뭉뚱그려 적대시하기보다는 사안별로 구분해 접근하는 자세가 국익에 더 부합할 것이다. 과도한 혐중의 부메랑을 경계해야 한다.

지난 1년은 외교·안보의 흐트러진 원칙을 재정립하는 정상화의 원년이었다. 남은 4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원칙을 지켜나가되 유연성을 보완해야 한다. 가치외교를 넘어 국익외교에 집중해야 한다. 국민은 톡 쏘는 청량음료 같은 기분 좋은 외교에 손뼉을 치겠지만, 지도자는 다소 미지근해도 몸에 유익한 보리차처럼 실리를 챙기는 외교를 보여줘야 한다.

지난 4월 27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자유의 동맹, 행동하는 동맹'을 주제로 연설해 큰 박수를 받았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둘째, 절제된 언행과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양안의 평화와 안정을 지지한다"고만 하면 되지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한다"는 사족을 굳이 붙일 필요가 있나. "한·일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가자"고 하면 될 것을 "일본이 무릎 꿇을 필요는 없다"는 구절은 누가 넣었나.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처럼 균형감 있는 참모를 가까이해야 한다.
셋째, 무엇보다 인재를 잘 골라 써야 한다. '늘공'은 무사안일에 빠지고, '어공'이 '늘공'처럼 몸 사려서야 되겠나. 신상필벌로 공직 분위기를 일신해야 한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한 참군인'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을 중용한 인사는 신선했다. 남은 4년의 성패도 결국 인사에 달렸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