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4.3, 올해엔 학생들과 '사북항쟁'을 노래합니다

안사을 2023. 5. 1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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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과 함께 만드는 창작 뮤지컬, 세 번째 작품의 시작

'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지난해 이맘때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한국사, 통합기행을 비롯해 다양한 과목과 융합해 수업을 기획하기도 했다. 어디에 내세울 수도 없는 졸작을 만들면서, 혼자 슬럼프에 빠졌다가 극복을 했다가 별난 모습을 보이면서 끝내 공연을 완성했다.

엄숙하면서도 빛났던 아이들, 숙연하게 뮤지컬을 관람했던 교사들과 양육자들. 커튼콜이 끝나고, 뒷정리를 마치고, 누군가가 제안했던 뒤풀이를 마다하고 집으로 향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순간에는 오히려 과도하게 즐겁지 않으리라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어둡지만 아늑한 방바닥에 몸을 뉘었다. 들을 사람 없으니 마음껏 기지개를 켜며 "끝났다!"를 외쳤다. 그 순간, 새로운 악상이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2023학년도의 새 뮤지컬 오프닝 넘버의 첫 부분에 대한 음악적 아이디어였다. 외마디 탄성으로 당분간의 쉼을 예약한 순간 새로운 일거리가 스스로 당도한 것이었다. "에이, 씨~"를 외치며 치켜올렸던 손을 스르르 내렸다.

올해는 사북항쟁을 노래합니다

올해 그려보고자 했던 주제는 '사북항쟁'이었다. 사북사태라고도 하고 사북사건이라고도 하는 지금의 상황은, 지난해 주제였던 4.3사건을 4.3항쟁이라고 하지 못하고, 하물며 아직도 4.3사태라고 일컫는 이가 있는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당한 폭력이나 처우에 대한 대항을 '폭도의 반항'이라고 판단했던, 과거사의 그림자가 아직 남은 그런 모습 말이다. 

사북을 비롯해 강원도 내륙 지역을 여행하기 시작한 지 어언 8년이 흘렀다. 그동안 스무 번에 가깝게 정선을 방문했다. 강을 따라 여행하기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송천과 골지천, 지장천과 동강을 누비며 정선의 면, 리, 마을의 곳곳을 만끽했다. 그러면서 항상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아이들과 오면 참 좋겠다'는 것이었다.

2017년 겨울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했는데, 버스 시간이 많이 남아 정선읍에 하나 있는 서점을 들렀었다. 그곳에서 <내 사랑 사북>이라는 책을 만났다. 지역 안내서 같은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그 책에서 나는 사북사건을 처음 접했다. 학교에서는 배우지 않았던 놀랄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 발견한 책 한 권 이 책으로, 살면서 모르던 사건을 하나 알게 됐다.
ⓒ 안사을
소설은 '수하'라는 중학교 3학년짜리 여학생의 눈으로 서술된다. 분홍의 표지만큼이나 이 화자의 머릿속은 해맑아서 언뜻 보면 청소년 명랑소설이라고만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안경다리를 가운데 두고 살아가는 광산인들 애환이 가득 담겨있다. 화자와 배경의 극명한 대비로 인해 오히려 그들의 삶이 더욱 처절하게 느껴진다.
소설은 일종의 새드앤딩으로 끝나지만 청소년 소설이기에 사건의 끔찍함을 다 담지는 못했다. 이미 드러난 사실은, 사건이 끝난 직후 계엄 아래 매우 잔인한 수준의 고문이 있었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건 이전, 광산인들의 비참한 삶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산 것이 하루이틀은 아니지만, 별의별 인간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긴다. 이 광산촌에는 사회 시간에 배운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거나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아빠는 이 모든 게 사람의 생명보다는 광부들을 탄 캐는 기계 정도로 생각하고 몰아치는 선 생산 후 안전', 그러니까 생산이 먼저고 안전은 그 다음이라는 회사 방침 때문이라고 했다. 하긴, 춘배 아저씨 말마따나 온 세계가 석유 파동에 휩싸여 땅속에서 캐내는 탄덩이가 모두 노다진데, 돈에 눈이 뒤집힌 족속들이 광부들의 생명이나 안전이 눈에 보이기나 할까.

비단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자 이 주제를 선택한 것만은 아니었다. 융합수업으로 구성되는 우리 학교 2학년 교육과정의 특성상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길 원했다. 통합기행을 통해 정선의 뼝대와 물줄기를 아이들의 눈에 담아주고 싶었고, 초가을 성질 급하게 먼저 물든 운탄고도를 함께 걷고 싶었다.
한국사 수업에서는 토론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역사적 사실 속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과학 시간엔 강원도의 지질구조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영어 시간에는 기행 일기를 영어로 작성해보는 등 다양한 과목에서 연계된 수업을 짜고 있다.
 
▲ 교육과정 설명 뮤지컬, 한국사, 통합기행 등 여러 과목을 융합한 교육과정을 학기 초에 설명하는 모습.
ⓒ 안사을
 
뮤지컬 시간, 학생들과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은 소설 <내 사랑 사북>을 긴 시간을 할애해 함께 낭독해 읽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수하의 삼각관계에 키득거리기도 하고 우물가에서 여인들이 수다 떠는 장면에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성실하고 가정적인 가장이었던 수하의 아빠가 광산 사고로 갇히는 장면에서는 손에 땀을 쥐기도 했다.
따옴표 안의 말에 연기를 가미하도록 주문하자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당시 사북에는 일자리를 위해 팔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는데, 각 지방의 사투리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속도는 더뎠지만 해찰하거나 조는 아이 하나 없이 읽기 활동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 읽기 수업 중 뮤지컬의 배경이 될 소설을 함께 모여 낭독하고 있다.
ⓒ 안사을
   
▲ 읽기 활동 낭독과 함께 간단한 질문지를 작성하면서 잭의 내용을 내면화한다.
ⓒ 안사을
 
아이들은 시간마다 읽은 장과 관련해 세 가지 질문에 답한다. 등장인물과 사건의 내용을 파악하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적는 활동이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소설 속 사건을 내면화하고, 추후 뮤지컬로 만들었을 때 필요한 자료를 생성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난해의 창작 뮤지컬은 올해의 것보다 사안이 더욱 엄중했기에 거의 나 혼자 만들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래의 가사와 연기의 대사를 아이들이 직접 써보게 할 생각이다.

"책을 다 읽고, 반별로 표현하고 싶은 장면을 고른 후에 가사와 시나리오를 여러분이 직접 쓸 거예요."
"네? 저희가요? 어떻게 그걸 써요. 어려운데..."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너희들이 쓴 내용 그대로 활용 못 해. 선생님이 음악에 맞춰서 강세나 표현 등을 수정할 거니까 너희들은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됩니다."
"우리가 써낸 것들 중에 과연 쓸모있는 게 있을까요?"

"일종의 아이디어만 내가 빌려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니까 걱정 마세요. 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40명이 같이 생각하는 게 훨씬 도움 되겠지."

4월이 되고 낭독의 진도가 1/3 정도 나갔을 때, 나는 지난해에 떠올렸던 음악적 아이디어를 실제 소리로 만들기 시작했다. 첫 부분은 금관악기의 화성을 증5도로 배열해 불협화음을 만들고 타악기와 함께 배치해 리듬감을 줬다. 막장에서 일꾼들이 땀을 흘리며 리듬에 맞춰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어서 나오는 장중한 느낌은, 광산에 가족을 보내놓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비는 가족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일을 마친 후 따뜻한 가족들과의 사랑을 나타내기도 했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나오는 부분은 소설의 화자인 수하가 등장하는 장면이고 뒤이어 나오는 어두운 부분은 광산 사고의 장면이다.
 
▲ 2023 뮤지컬 중 오프닝넘버 <1980, 사북> ⓒ 안사을

가장 기대감을 가지고 준비하는 악곡은 '어긋난 탱고' 부분이다. 노동자의 노래이기도 한 탱고는 보통 남녀가 함께 진한 춤을 추는 배경 음악으로 쓰인다. 그러한 측면을 반대로 표현해, 이번엔 노사간의 갈등과 결렬을 표현해보고자 한다. 그러려면 안무가 중요하다. 이 안무 창작 평소 댄스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두 학생이 맡아주기로 했다.

위 악곡은 서곡이자 오프닝넘버로서 뮤지컬 전체의 서사와 분위기를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총 8분 정도의 길이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내가 미리 쓸 수 있는 부분은 이게 전부다. 이제 아이들이 시나리오와 가사를 써주어야 악상을 떠올릴 수 있다.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창작물이기에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더욱 교육적인 상황으로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손에서 출발한 작품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실체가 없는 단계에서 점점 구체화되어가는 과정을 몸소 겪을 것이다.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활동에 몰두할 것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 아이들이 투사로 자라나기를 원하진 않는다. 다만 다양한 삶이 있고,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기를 바란다. 더불어 모두가 작은 예술인이 돼 주체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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