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행위가 인간의 뇌와 존재에 영향을 끼친다고?
[허형식 기자]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쳐지는 기억이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버스에 치여 죽을 뻔했다. 원인은 내 귀를 막고 있는 이어폰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저 멀리 건널목을 살피니 보행자 신호 녹색등이 점멸하고 있었고, 내 달리기 실력을 가늠하니 충분히 건너갈 수 있으리라 '보였다'.
건널목 왼쪽에서 버스를 발견했을 땐, 난 이미 건널목에 진입하고 있었다. 점멸하는 녹색등에 버스는 그냥 지나치려 했고, 빽빽한 가로수가 시야를 가려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튼, 종이 한 장 차이로 버스를 지나치는 덕분에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 소리의 마음들 표지 |
ⓒ 위즈덤하우스 |
30년 넘게 뇌와 청각의 협업을 연구한 신경과학자 니나 크라우스는 이 책에서 '소리 마음(Sound Mind)'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과학책 제목치고는 매우 은유적이라 생각했는데, 소리 마음의 정체를 알고 나니 이보다 명확한 제목은 없겠다.
'소리 마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이라는 개념에 소리를 더하면 된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한 사건과 경험이 뇌와 상호 작용을 거쳐 생성된 것이 '마음'이듯이, 소리 마음은 당신이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소리적 경험이 뇌와 상호작용해 만들어진다. 그렇게 형성된 소리 마음은 마음이 우리에게 하듯이, 외부의 소리를 선별하고 조율하면서 나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거꾸로 의미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같은 소리를 들어도 의미가 달라지는 이유
똑같은 소리를 들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최종 7차전을 상상해 보라. 사람들의 열띤 응원 소리와 장내 방송으로 시끄럽다. 이 와중에 어떤 사람은 본인이 응원하는 팀에서 적시타가 나오기만 바라며 아무 소리도 인식하지 못한다.
반면 누군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 손잡고 야구장에 가던 날, 야구장 앞에서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던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이 떠올라 미소 짓는다. 또 누군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주변의 함성이 불쾌해, 시야가 캄캄해지는 기분까지 느낀다. 소리 마음이 저마다 달라서 일어나는 일이다.
'소리 마음'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소리의 마음들>을 쓴 니나 크라우스 박사는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애초 포식자나 다른 환경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리 지각이 진화했듯이, 소리는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다.
시각과 달리 청각이 365일 24시간 내내 열려 있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절대 잠들지 않는 불침번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친구는 알아서 선별 작업을 하기에 더 믿을 수 있다. 어떤 소리가 중요한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고 불필요한 소리는 저 멀리 치워두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
깨어 있는 동안 '안전한' 소음이 소리 마음에 가하는 충격은 아이들에게 특히 치명적일 수 있다. 아이들은 언어학습의 대가다. 부모들은 아이가 첫 단어를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문장 전체를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소리-의미 연결은 무척 빠르게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자신이 접하는 언어를, 심지어 여러 개의 언어도 척척 배운다. 그런데 이런 결정적 시기에 아이들이 접하는 소리가 무의미하다면 어떨까?
- 279p
소리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저자는 음악 연주와 외국어 학습을 손꼽는다.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는 특정 소리와 특정 의미를 연결하는 일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소음에서 더 잘 듣고, 기억, 실행 기능, 인지적 유연함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특히 음악을 하는 행위는 학업 성취와 듣기 능력의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음악을 하는 경험이 당신의 뇌의 미래를 결정한다"
책에는 니나 크라우스가 박사가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벌인 장기 추적 프로젝트가 등장한다. 저소득층 동네의 아이들은 괜찮은 환경의 또래들에 비해 읽기와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아이들은 읽기 능력을 유지했다.
재미있는 건, 음악 기초 훈련(연주보다는 신중하게 집중적으로 음악 듣기)을 진행한 1년 동안은 뇌의 직접적인 변화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본격적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는 2년이 지나서야 '뇌의 소리 처리'가 바뀐 게 확인된다. 즉, 음악에 적극 관여해야 소리를 처리하는 뇌에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책을 덮으니 치매에 걸리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저자에 의하면 소리는 뇌 건강의 보이지 않는 동지이자 적이라 했다. 저자의 주장처럼 아버지도 치매 전에 청력 상실이 먼저 왔었다. 치매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청력 상실이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손상해 치매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미 저질러진 일은 어쩔 수 없겠지만, 앞으로의 나를 위해서라도 '소리 마음'을 챙겨야겠다. 천만다행인 건, 나이가 들어도 충분히 소리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TV에서 들리는 뉴스의 소음이 거슬린다면, 음악 연주와 외국어 공부를 잊지 마시길. 혹시 아는가. 연주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올려 부업 소득을 올릴 수도 있고, 자막 없이 넷플릭스를 보며 깔깔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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