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미인선발대회의 숨은 의도

김종성 2023. 5. 1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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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구미호뎐 1938>

[김종성 기자]

tvN 판타지 사극 <구미호뎐 1938>은 구미호가 남자 몸을 하고, 거기다 스마트폰까지 들고 1938년에 불시착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름이 이연(이동욱 분)인 구미호가 1938년에서 현대로 돌아오기 위해 분투를 벌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1938년은 일제강점기가 막판으로 들어가는 시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그 시절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런 풍경 중 하나가 미인 선발대회다.

지난 7일 방영된 제2회에서 '미스조선 선발대회'가 비중 있게 묘사됐다. 관객들과 심사위원단 앞에서 여성 후보들이 개별적으로 불려나와 지적·신체적 아름다움을 홍보하는 장면이 있었다.

'미쓰조선' 선발 대회의 방식
 
 tvN <구미호뎐 1938> 한 장면.
ⓒ tvN
 
이 드라마의 배경인 1930년대는 본격적 형태의 미인대회가 나타나던 때였다. 일본이 만주사변(1931.9.18)을 도발하기 2개월 전에 발행된 1931년 7월 20일자 <조선일보>에 '미쓰조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하는 미스조선 선발대회를 소개하는 이 기사는 "대판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에서는 미쓰조선이라 하야 조선에 사는 미혼 녀자로 가장 잘생긴 사람 두 명을 일본인측 한 명, 조선인측 한 명씩 뽑으리라 한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1차로 한국인 10명과 일본인 10명을 뽑은 뒤 최종적으로 한국인·일본인 각 1명을 미쓰조선으로 선발하게 된다고 전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한·일 각 1명을 공동 미쓰조선으로 선발했으니, '내지와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이념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지원자의 직업에 제한을 뒀다. "후보 자격은 기생이나 배우, 음식점 작부가 아닌 미혼 녀자"라고 기사는 전했다. 예능인에 가까웠던 기생을 포함한 몇몇 직업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조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또는 기생이나 배우 중에는 유명인들이 많으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미쓰조선으로 선발하겠다는 의도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1931년 그해에는 대중 잡지 <삼천리>를 발행하는 삼천리사도 미인대회를 열렸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로 시작하는 '국경의 밤'과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로 시작하는 '산너머 남촌에는'을 지은 시인 김동환의 출판사도 이런 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친일파로 변모하게 될 김동환의 회사가 주관한 이 대회의 당선자는 '삼천리일색'(三千里一色)으로 불렸다. '미쓰 코레아'라는 호칭도 함께 사용됐다. 이 대회에서 특선으로 뽑힌 사람은 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졸업한 최정원이라는 18세 여성이었다. 일본 신문사에 의해 뽑힌 미스 조선과 달리 국내 출판사에 의해 선정됐으므로 최정원이 실질적인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인 겸 간호사로 활동한 최정원은 3년 뒤인 1934년에 <낙동강>이라는 첫 소설을 발표해 또다시 주목을 끌었다. 낙동강 유역 소작인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이 작품은 소설가 장혁주로부터 '완벽한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당시 표현을 빌리면 '완벽한 리아리씀 혹은 리아리즘' 작품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해 11월 1일자 <삼천리> '최정원씨의 낙동강을 읽고'에서 장혁주는 "최정원씨의 수법은 완벽한 리아리씀이다"라며 "이것이 아직도 나어린 여성의 손으로 된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것인가?"라고 칭송했다.

넉 달 뒤인 1935년 3월 5일 발행된 <동아일보> '최근 문예논평 4'는 "완벽한 리아리즘이라고 경탄한 장혁주씨의 소개문은 좀 과장된 점이 있어"라고 하면서도 "신춘문예 작품 제일류에 속해서 마땅할 것이라 생각하였다"라며 "특히 묘사 수법에 잇어 간간 보여준 교묘한 필치는 이 작자의 뛰어난 재질을 엿볼 수가 잇엇다"라고 호평했다.

최정원은 삼천리일색이 된 지 3년 뒤에 소설을 발표해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스코리아가 된 1931년에는 과연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부정적 시선도 받았다. 비난에 가까운 혹평이 그해 10월 10일자 <조선일보> '10월 잡지평 1'에 실렸다. 이 기사는 3주년 기념인 <삼천리> 10월호의 분량이 많은 점을 지적하면서 이 잡지에 발표된 삼천리일색 최정원에 관한 악평을 내놓았다.

"3주년 기념호이니만치 페지 수(數)도 만타. 첫머리에 삼천리일색 미쓰코레아가 발표되엿다. 전 조선을 모와노흔 미인이오. 조선의 문인·화가·무용가의 제(諸)권위들의 엄선한 것이나, 1등 당선된 여자는 나의 보기에는(감상안이 저급해서 그런지 몰나도) 미쓰코레아란 말만 하기도 미안스럽다. 조선에 그러케 미인이 업슬가?"

사진 콘테스트의 진짜 의도
 
 tvN <구미호뎐 1938> 한 장면.
ⓒ tvN
 
 tvN <구미호뎐 1938> 한 장면.
ⓒ tvN
 
<구미호뎐 1938>의 미인대회 참가자들은 화려한 무대에 올라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을 홍보했다. 구미호 이연도 심사위원이 되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 화한 전직 산신인 류홍주(김소연 분)의 대타로 나가 후보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하지만 실제 최정원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선출되지 않았다. 위 드라마 풍경은 일제강점기 미인대회와 동떨어진다. 여성들을 무대에 세워놓고 이리저리 뜯어보며 심사하는 모습이 이 시기에는 없었다. 이 시대 한국인들은 감히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삼천리일색과 미스조선의 선정은 사진 콘테스트 방식으로 이뤄졌다. 위에 소개한 <조선일보> '미쓰조선' 기사에도 그것이 소개됐다. "널리 후보자 사진을 모집하야" 심사 자료로 활용한다고 이 기사는 보도했다. 1940년에 개최된 미스조선 선발대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후보자를 무대에 세워놓고 심사하는 방식은 해방 이후에나 나타났다.

2014년 6월 <미술사 논단>에 실린 김지혜 한국미술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미스 조선, 근대기 미인대회와 미인 이미지'는 "미인들을 한 장소에서 모으고 직접 심사하는 미스아메리카와 같은 형태의 미인대회는 당시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을 고려할 때 조선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콘테스트 방식은 주관사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이는 대중의 지갑을 여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심사위원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평가의 기회를 부여했다. 그래서 후보자 얼굴을 확인하고 투표를 하려면 신문이나 잡지를 구매하든가 빌려볼 수밖에 없었다.

위 논문은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의 미스조선을 뽑기 위해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15만 명이 넘는 독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미인대회 주최가 신문사나 출판사의 수익 창출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사나 출판사 입장에서는 후보자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관람객들을 유도하는 방식은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지면에 사진을 실은 뒤 대중이 그것을 구입하도록 하는 방식이 훨씬 유리했다.

이런 판촉 전략에 더해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 등도 함께 작용한 결과로 사진 심사 및 인기투표 형태의 미인선발대회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구미호뎐 1938>에 묘사된 장면은 일제강점기의 그 같은 분위기와 동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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