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제주에서 가꾸는 5500원짜리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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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기자]
고향 제주도로 돌아오기로, 90대가 되신 어머니와 동거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 대략 3년 전이다. 낡고 오래된 부모님 집에 계속 살기는 어려울 듯해서 일단 전셋집을 구하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전세 상황을 알아보았다. 내 경제 상황에 맞는 전셋집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며칠 내려가서 직접 둘러본다 한들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직접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별 기대 없이 내려가서 처음 본 집을 바로 계약하게 되었다.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 주로 밭들만 있는 곳에 지어진 새 빌라였다. 15평 정도의 넓이에 신기하게도 방 3개, 화장실 2개나 있었다.
어머니 집이 너무 낡아서 살기가 힘드니 일단 세를 얻어서 이사를 하자고 몇 달 전부터 어머니한테 얘기해 왔고, 어머니도 그렇다며 동의했다. 그런데 계약을 앞두고 그 집을 같이 보러 간 어머니는 낯선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지 둘러보려고도 하지 않고 구석에 그냥 앉아있었다.
언니와 내가 집 너무 좋다는 얘기를 반복하며 분위기를 띄웠지만, "나 죽을 때까지는 이사 안 해도 되지 않으카?"라며 이사를 내켜하지 않으셨다. 익숙한 곳을 두고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많이 버거웠던 것 같다.
마당뷰가 가져다준 행복
막상 그 집에 살게 되자 어머니는 빠르게 적응해 갔다. 2층인 집에서 밭과 찻길이 내려다보이는 것도 시원하다며 좋아했고, 할머니와 아버지도 이 집에 살았으면 좋아했을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나 역시 깔끔하고 편리해서 좋았고, 옥상에 올라가면 한눈에 들어오는 한라산과 바다 풍경도 짜릿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살다가 어머니 집을 리모델링해서 이사를 했다. 이사가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이렇게 밖이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데 살다가 우리 집에 가면 좀 답답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두 집 중 선택하라면 어딜 택하겠냐고 물으니 그래도 당연히 이녁(자기) 집이 좋다고 하셨다. 나도 2층의 트인 풍경이 없어서 좀 답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런데, 이사 첫날 하룻밤을 자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그 익숙한 마당이 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듯 따뜻했다. 내가 땅을 딛고 사는구나 하는, 땅과 더 연결된 편안함과 안정감이 나를 감쌌다. 한강뷰, 바다뷰 등 멋지고 비싼 뷰들이 많지만, 작은 마당과 텃밭이 보이는 나의 소박한 마당뷰가 나는 참 행복하다.
이렇게 땅으로 내려와서 첫봄을 맞았다. 풀들이 아우성치며 봄을 알렸다. 풀들이 마당을 점령하는 건 눈 깜짝할 새라는 걸 알기에 몸이 불편한 대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언니들도 며칠씩 짬을 내서 올 때면 안팎으로 집 정리를 해놓고 가곤 한다.
4월이 되어 모종들이 눈에 띄자 상추, 깻잎, 고추, 가지, 오이, 방울토마토 각 천 원씩 육천 원어치를 사왔다. 나는 모종을 심고, 어머니는 풀을 뽑으며 밭 정리를 했다. 오이는 나중에 줄기 뻗으면 담으로 올릴까 했더니 어머니는 그러면 아마 뜨거워서 말라 죽을 거라고 했다.
▲ 어머니와 나의 방과후 활동 4월 중순 상추, 깻잎 등 모종을 심고 풀을 뽑았다. 바람 없고 햇볕 좋은 날엔 종종 마당이나 텃밭에서 한시간 넘게 보내고 있다. |
ⓒ 이진순 |
작은 땅이 우리에게 내어주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많다. 씨앗이 땅을 뚫고 잎을 내밀고 열매를 맺는 그 변화를 보다 보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며칠 지나서 모종 상태를 보러 나갔더니 분명히 있어야 할 오이 모종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용의자는 명확했다. 예전에도 어머니는 풀을 뽑으면서 호박 모종이던가를 뽑아버렸던 전력이 있다. 하나 남은 모종 더 잘 키워야 할 이유가 생겼다. 자신의 행위를 모르고 있을 용의자에게는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갔고, 마음으로 용서했다.
몇 번의 비를 맞으며 상추와 깻잎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어버이날 가족모임 때 한 소쿠리 뜯어다 가족들이 첫 개시를 했다. 마트에서 산 상추랑은 신선함이 다르다, 농약도 안 친 거여서 너무 좋다 등 칭찬도 해가며. 이 자리에서 마침 어머니의 소행이 생각나서 "어머니. 저번에 풀 매멍(뽑으면서) 오이 모종도 매엉 대껴부러성게(뽑아서 던져버렸더라)"라고 폭로했다.
그렇게 500원짜리 오이 모종은 식구들이 모여서 한 번 웃는 재료로서 제 역할을 하고, 텃밭 어딘가에서 퇴비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제 일주일에 이틀쯤은 텃밭에서 밥상으로 야채들이 올라올 것 같다.
날이 따뜻해져가면서 종종 어머니와 나는 마당이나 텃밭에서 방과 후 활동을 한다. 풀 뽑기(제주어로는 '검질매기')가 주 활동이다. "야, 토마토꽃 펴신 게~"라며 어머니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핀다.
육천 원을 심고 그중 오이 모종 하나 오백 원은 일찌감치 뽑혀 버려서 지금은 오천오백 원이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 상추와 깻잎쌈을 싸먹고, 하루하루 늘어가는 토마토꽃을 확인하고, 오이, 고추, 가지가 커가는 것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누릴 오천오백 원의 행복에 흐뭇해지는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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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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