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콜 센터는 '진상주의보'를 내린다
이 글은 2023년 대전시 감정노동존중 수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김세은씨의 글입니다. <편집자말>
[대전광역시노동권익센터 기자]
▲ 욕설을 사용하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모욕을 67분간 당했다 |
ⓒ 픽사베이 |
늦여름. 선선한 바람이 불법도 한데 여전히 날이 후덥지근하다. 몇 차례나 고장이 나는 에어컨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았다. 이제는 콜센터 번호를 손이 기억한다. 자동 녹음 음성이 흘러나온다.
"지금 여러분과 대화하는 상담사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2018년 시행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5분 만에 상담사와 연결됐다. 사실 만족스러운 상담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 에어컨이 자주 고장 나게 된 원인은 아니니 화낼 필요 없다.
"친절한 상담 감사합니다."
처음에 시도했을 때는 낯간지러웠다. 굳이 끝난 상담 끝에 사람을 붙잡고 건네는 말이기도 했고 원래 사람에게 살가운 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입에 붙어 익숙해지길 바라며 모든 전화 상담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습관이 되니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서 멘트에 약간씩 변조를 주기도 했다. 이런 말 한마디가 인바운드 상담사(전화를 받는 상담사)에겐 실적이 되고, 실적은 곧 월급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다.
장콜에 걸렸다 벌어지는 일
인바운드 콜센터는 오전 9시 또는 8시부터 업무를 시작해서 늦으면 7시, 8시까지 근무한다. 총 근무 시간만 10시간이 넘고 가끔은 점심시간도 전화를 받는다. 담배를 배우지 않으면 마땅히 쉴 겨를도 잘 없다. 앉아서 한 시간에 열 개 이상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 그러다 재수 없이 '장콜'(5분이 넘어가는 전화)이 여러 번 걸리면 그날 하루 실적은 없는 셈 쳐야 한다.
그런 하루 속에서 기계처럼 전화를 받다가 들리는 친절한 한 마디는 가뭄의 단비 같은 말이다. 현실에서는 한 명의 진상 때문에 영화처럼 당장 전화기를 박차고 뛰쳐나갈 수 없다.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우는 한이 있더라도 울고 나서 다시 준비 버튼을 클릭해야 한다. 콜센터는 하나의 양계장이고 한 명의 닭이 폐사하면 다른 닭이 할당량을 채워야 하듯이, 거대한 연대 책임 속에서 노동자 개인이 빠져나갈 곳은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음 고객이 선량하길 바라는 것이다. 불특정한 누군가의 불확실한 선의에 기대는 것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게 내가 되자. 지금 이 수화기 너머로 내 전화를 받는 사람이 닭장에서 도망갈 수 없다면 적어도 다음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자. 그런 마음에서 시작한 작은 행동이었다.
내 한마디가 그 사람의 실적으로 집계될 수도 있다. 물론 기업이 전화 상담 번호를 알아보기 힘들게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겨우 찾아 전화했더니 5분 넘게 지연되는 상황을 겪고 나면 내가 이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쉬이 호의를 건네기도 어려운 일인데, 나는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담이 끝나갈 무렵이면 일이 해결되었든, 되지 않았든 양쪽 모두 전화를 끊고 싶으므로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을 수 없다.
이런 와중에는 내 말을 꺼내기도 어려울뿐더러, 이런 행동이 곧장 이 사람의 실적과 인센티브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마치 기업이 노동자에게 단 한 푼의 보상도 쥐여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금만 더 친절해지자. 거대한 악의에는 다수의 작은 선의로 맞서자. 그 작고 별거 아닌 행동이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시작하게 된 가장 큰 계기 중 하나는 나 역시 누군가의 작은 친절에 기대어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비오는 날 콜센터에서는 진상을 조심하라고 한다 |
ⓒ 픽사베이 |
여름, 내가 잊지 못하는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대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날에는 콜센터 전체에 비상이 걸린다.
"자, 오늘 비오니까 진상 조심합시다."
어느 콜센터든 비가 오면 똑같은 말로 주의를 줄 것이다. 비 오는 날은 기운이 안 좋은 건지 몰라도 유달리 진상과 장콜이 넘쳐났다. 장마철이라 며칠째 비가 그치질 않았고 팀원들이 돌아가며 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정말 운이 나쁘게도 내가 장콜에 걸리고 말았다. 대기를 누르자마자 이입된 고객은 나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고, 나는 교육 시간에 배운 대로 응대를 진행했다.
"욕설 사용하시면 상담이 어렵습니다."
그 말을 한 다음부터 고객은 정말 통상적인 의미의 욕설을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서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모욕했다. 장장 60분이 넘어가는 콜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떨어지면 감당 못 하고 서럽게 울 것 같아서 고개를 끝까지 쳐들고 헤드셋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잡은 채 한 손으로 메모하며 전화를 받았다.
헤드셋을 집어 던지지도 못하고 그 모욕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다. 전화가 끝이 나고 지켜보던 팀장은 15분 동안 화장실에 갔다 오라고 했다. 67분의 모욕을 견뎌낸 보상이었다. 나는 이대로 멈추고 화장실에 가면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둘 것 같아서 휴식을 거부하고 대기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다음 고객이 인입되었고,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연기하며 응대했다. 전화가 끝날 무렵, 아주 작고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친절하게 상담해 줘서 고마워요."
방금 전의 장콜에서도 울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울 뻔했다. 어쩌면 감정에 북받쳐 일그러진 목소리가 들렸을지도 몰랐다. 그 말이 없었다면 다음 콜을 받기 전에 홀연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그날의 긴 업무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것이 내가 낯간지러운 말을 하게 된 이유다.
내가 작게 건넨 한 마디가 그 사람이 하루를 견딜 수 힘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더불어 실적과 인센티브로 이어지면 더욱 좋은 일이다.
오늘 나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하루를 이겨내길 바라는 선의. 그리고 이런 작은 행동이 퍼질 수 있다면 지금은 한 명의 하루지만, 한 명의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열 명의 하루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정말 작은 선의가 모여서 가져올 파급력을 기대한다. 나 한 명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오늘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미미한 실천이 포자처럼 퍼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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