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은 빨리 지나갈수록 당신만 손해입니다

김종성 2023. 5. 1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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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수변길과 숲길, 운치있는 고택 있는 밀양아리랑길 3코스

[김종성 기자]

 밀양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가 있는 밀양아리랑길.
ⓒ 김종성
파주 DMZ 평화누리길, 안동 선비순례길, 여수 갯가길 등 지자체마다 특색을 살린 도보여행길이 있어 해당 지역을 가게 되면 꼭 걸어보게 된다. 빽빽하고 촘촘한 햇볕의 도시 경남 밀양(빽빽할 밀(密), 볕 양(陽))에도 그런 길이 있는데 바로 '밀양아리랑길'이다.

지난 1일 밀양의 물줄기 밀양강을 따라 아름다운 수변길, 숲길과 옛 선비들이 지어놓은 별서(別墅, 별장), 고택에 사는 무려 420년 묵은 장대한 은행나무, 정다운 강변마을이 이어지는 3코스를 여행했다. 인터넷 지도에서 밀양아리랑길 3코스를 검색하면 코스가 잘 나온다.

밀양철교 - 천경사 - 금시당 수변길 - 금시당 - 월연정 - 강변마을(고례마을) - 추화산성까지 5.6km의 길이다. 안내장엔 3시간 코스라고 나와 있는데 걸어보고 나니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빨리 지나가면 갈수록 손해를 보는, 발길이 절로 머물게 되는 곳들이 많다.
 
 석굴법당이 있는 산 절벽 사찰 천경사.
ⓒ 김종성
 
 강변 숲속을 따라 옛 선비들이 오갔던 금시당 길.
ⓒ 김종성
 
 금시당 가는 숲길에서 보이는 밀양강.
ⓒ 김종성
조선 선비들이 걷던 금시당 길

길 들머리에서 만나는 천경사(天鏡寺)는 용두산(120m) 절벽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절 경내까지 나무 데크가 나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연꽃을 꾸미며 '부처님 오신날' 준비를 하던 보살님들이 석굴법당에 꼭 가보라고 추천하신다. 정말 산속 동굴에 법당을 만들었는데 에어컨을 켜놓은 듯 시원하다.

천경사에서 옛 별서 금시당까지 가는 수변길은 '금시당길'로 조선 선비들이 학문을 닦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다니던 길이었다. 5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선비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용두산, 용두목, 용두연, 용호 등 용(龍)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구나 했더니 옛 선비들이 지은 이름이었다.

금시당 가는 숲길 왼편에는 밀양강이 흐르고, 오른쪽엔 용두산 나무숲이 오뉴월 햇볕을 막아주어 걸음걸음이 가뿐하기만 하다. 오르락내리락 완만한 경사의 둘레길이 이어져 힘들지도 않고 숲길을 걷는 즐거움을 더한다. 밀양강에서 가장 긴 징검다리도 지나가게 되는데 꼭 걸어보길 추천한다. 밀양아리랑 노래처럼 경쾌한 밀양강물 소리를 들으며 긴 징검다리 위를 걷는 기분이 색다르다.
 
 금시당 길에서 만나는 밀양강 제일의 징검다리.
ⓒ 김종성
익숙한 새소리 외에 처음 들어보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와 발걸음을 경쾌하게 해준다. 문득 새들의 노랫소리가 이 길의 이름인 밀양 아리랑 노래를 떠올리게 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속으로 흥얼거리다보니 다른 지방의 느리고 애절한 아리랑과 달리 밀양 아리랑은 전혀 다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왜 밀양의 아리랑은 신나고 경쾌한 노래가 된 걸까, 궁금한 마음에 길섶에서 만난 사찰의 스님, 팔각정 휴게소 아지매와 강변 별서를 관리하는 후손 아재에게까지 물어보았으나 딱히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다음날 밀양의 대표 관광지 영남루에 갔다가 밀양시티투어를 진행하는 문화해설사에게서 그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밀양은 경지 면적이 경상남도에서 가장 넓은 곳으로,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면서 넓고 기름진 평야를 만들어 주었다. 삼한시대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3대 저수지로 불리는 수산제도 밀양에 있다.

그러다보니 예부터 먹거리가 풍성하고 큰 재해가 없었던 풍요의 고장이었단다. 밀양아리랑의 경쾌한 리듬은 풍족한 삶 속에서 나온 여유로움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유유자적 쉬어가기 좋은 금시당.
ⓒ 김종성
 
 금시당 마당에서 보이는 밀양강.
ⓒ 김종성
    
 금시당 마당에 사는 420살 은행나무.
ⓒ 김종성
금시당은 이 별서를 지은 조선시대 좌승지를 지낸 이광진 선생의 호다. 고택 옆에 새 한옥을 짓고 후손이 살고 있다. 조선 성종 때인 1566년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이 1744년에 복원했다. 금시당 안에 백곡서원도 창건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금시당 마당을 거닐다보면 밀양강이 휘감아 돌며 만든 용호가 한눈에 펼쳐진다. 금시당은 주변 자연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영남지방 선비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물이라고 한다.

고택 툇마루에 앉아 주변 경치를 여유롭게 감상했다. 마당에는 선생이 직접 심은 수령 420년 장대한 은행나무가 밀양강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11월이면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잎이 사방을 황금빛으로 수놓고,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대문 밖 한참 너머까지 줄이 늘어선단다.

금시당을 지나면 밀양시 국궁장이 나온다. 주말·일요일엔 누구나 국궁을 배우고 직접 쏴보는 체험(체험비 4천 원)을 할 수 있다. 국궁장 옆 활성교 아래 밀양강변에는 금시당 유원지가 있다. 여름철엔 야영객이 물놀이를 즐기고 다른 계절엔 차박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지은 월연정.
ⓒ 김종성
 
 밀양강을 바라보며 걷는 월연정 둘레길.
ⓒ 김종성
  
 아름다운 강변마을, 교동 모례마을.
ⓒ 김종성
여러 건물이 모여 있는 특별한 강변 정자, 월연정

금시당에 이어 또 다른 강변 고택 월연정을 만났다. 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 선생이 1520년에 지은 정사(亭舍)다. 선생은 당시 함경도 도사로 재직하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개혁을 주장하던 선비들이 무더기로 죽거나 파직당하는 걸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이 별서를 지었다.

월연(月淵)은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보름달이 뜨면 더욱 아름답다고 하는데 볼 길이 없어 아쉬웠다. 조선 시대 정자가 대부분 단독으로 지어진 데 비해 월연정은 담양 소쇄원처럼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마루에 앉으면 오뉴월 햇볕을 안고 흘러가는 밀양강이 내다보인다. 월연정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건물을 지어 그 자체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말이 맞구나 싶다.

월연정에서 두 가지 길을 선택해 걸으며 밀양아리랑길을 마치게 된다. 하나는 월연정에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추화산(240m)에 있는 추화산성으로 오르는 길과, 밀양강변마을 모례마을(밀양시 교동)이다. 산보다 강을 좋아하는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마을회관 뒤에 펼쳐진 넓은 들판은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철 따라 꽃들이 피어나면 모례마을 들판은 흐드러진 초원이 된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주는 강변길에 벤치가 있어 밀양강을 바라보며 쉬기 좋다.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주민들 품에 매실이 가득하고,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아재도 보인다. 여러 길을 걷느라 허기진 배는 밀양시 인증 향토맛집 '할매메기탕'에서 달랬다. 매운탕 외에 평소 맛보기 힘든 메기구이도 먹을 수 있다. 메기탕 집 옆에 밀양 시내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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