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새벽 2시 ‘소아과 오픈런’ 시작됐다…캠핑의자는 필수
아침 6시 전에 29명 대기
“빨리 치료받고 쉬게 하고 싶어서…부모 마음이 다 똑같지 않나요”
왜 오프런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것일까. 아픈 아이의 진료를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던 기자가 함께 줄을 섰던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서울역 뒤편에 위치한 소화병원. 1946년 문을 연 국내 첫 어린이 전문병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소아청소년과 전문 진료 병원으로 2차 병원이면서 주말 진료도 가능해 많은 부모들이 찾는다. 특히 최근 영유아들 사이에서 감기가 크게 유행하면서 동네 소아과 진료로는 치료하지 못하고 큰 병원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맘 카페를 중심으로 상세한 진료 후기가 공유되면서 특정 병원들이 더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13일 새벽 4시 8분, 소화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9개월 된 아이가 일주일 넘게 고열에 시달리며 폐렴 초기 증상을 보여서다. 아직 세상은 캄캄했지만, 닫힌 건물 정문 앞에는 이미 6명의 보호자들이 줄줄이 앉아 핸드폰을 보거나 졸고 있었다. 아침 6시부터 접수를 위한 번호표를 나눠주는데, 빠른 번호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것이다.
‘작정하고’ 나온 이들은 5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용 외투를 입고 캠핑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조금 더 편안하게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다. 줄을 선 채 노트북을 켜고 업무를 보거나, 태블릿 PC로 영화를 보는 이들도 있었다. 휴대전화 보조 배터리도 빠질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다.
사흘 전 처음으로 새벽 접수를 하러 나왔는데, 그날은 캠핑용 야전 침대까지 등장했다. 한 아버지가 병원 앞에서 야전 침대를 깔아 두고 코를 골고 있었다. 새벽 4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앞선 자리에 있었으니 아마도 새벽 2~3시쯤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잠을 자더라도 자리를 지킨다면 순번은 유효했다.
그리고는 ‘1등’부터 차례대로 물었다. “몇 시에 오셨어요?”
병원 건물 외관에 첫 번째로 자리를 잡은 건 30대 남성 A씨였다. 그는 캠핑 의자에 앉아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흥미로워 보이진 않았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A씨는 3살 아이가 20일째 고열과 미열을 오가며 폐렴 초기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그가 병원 입구에 도착한 건 새벽 2시였다. 그의 수고로 아이는 이날 가장 먼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느냐’는 질문에 A씨는 “부모 마음이 다 똑같지 않나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계속 열이 나는 아이를 병원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고 했다. A씨는 “병원이 아이한테 좋은 환경은 아니잖아요”라면서 “아이가 열이 나서 힘드니깐 빨리 진료받고 빨리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라고 말했다.
소화병원은 오전 중에 당일 접수가 종료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제 시간에 나와서 접수를 하면 하루 종일 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리거나, 원하는 선생님한테는 당일 진료를 못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찍 나온다고 걱정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A씨는 “요즘 아이들 ‘입원 대기’도 심하다고 해서 입원 결정이 나오면 어느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2등은 서울 마포구에서 온 여성 B씨였다. 그는 2시 30분쯤 병원에 도착했다. B씨는 “맨날 남편이 새벽에 줄을 서기 위해 나가는 게 미안해서 오늘은 직접 와 봤다”고 말했다. B씨의 둘째 아이는 평소 비염도 있고 코감기에 자주 걸린다고 했다. 동네 소아과에서는 잘 해결이 안 되고 그렇다고 대학병원을 가자니 부담스럽고 해서 2차 병원인 이곳을 자주 찾는다.
B씨가 이 병원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는 H선생님 때문이다. H선생님은 세세한 진료를 봐준다는 후기가 많아 동네 맘카페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B씨는 “H선생님을 직접 뵙고 나니 신뢰가 생겨 자꾸 이 병원만 찾게 된다”고 말했다. 새벽에 줄을 서는 대기자들 대부분 H선생님 진료를 희망한다. 이어 “병원에 있으면 아이도 지치고 힘들다”면서 “한 사람이 빨리 와서 예약하고 가면 진료를 일찍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새벽에 나오게 된다”고 말했다.
새벽부터 나와 있는 대기 줄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B씨가 물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요?” 그러더니 이내 다시 혼자 답을 했다. “하긴 모바일로 예약을 해도 ‘클릭 전쟁’이 될 게 뻔한데, 어떻게 보면 이게 가장 공정한 방식인 것 같기도 하네요.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 먼저 나올 테니깐요”.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는 않아 보였다. B씨는 “정부는 새벽부터 줄 서는 부모들의 절실함을 모르는 것 같아요”며 “맨날 저출산 대책을 세운다고 하는데 당장 ‘소아과 대란’ 현상을 좀 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은 사회적 여건이 저출산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지적이었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세 번째로 도착한 C씨는 몇 년째 이 병원을 이용하고 있는 단골이었다. C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새벽 4시에 오면 1등을 할 수 있었는데, 올해 초부터는 4시에 오면 이미 사람들이 4~5명 와 있다”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소아과 대란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굳이 새벽에 나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C씨는 ‘일상’을 살려면 새벽에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C씨는 “회사도 다니고 일상을 보내려면 최대한 빨리 진료를 보고 돌아가야 가능하다”며 “한번 늦게 왔다가 하루종일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렸더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괜찮은 소아과가 많아져야 할 텐데 갈수록 소아과가 줄어든다고 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간이 의자를 들고 온 C씨는 조만간 캠핑 의자를 구매해야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더 많은 날을 병원 앞에서 지새우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 듯했다.
올해 초부터 대기 경쟁이 과열되면서 크고 작은 에피소드도 생기고 있다. 최근에는 ‘1번’ 번호표가 사라져 논란이 됐었다고 한다. 병원에 가장 먼저 도착해 줄을 섰던 사람이 번호표를 뽑았는데 1번이 아니라 2번이었던 것. 누군가 사람들 몰래 번호표를 뽑아간 것으로 추정됐다. 사람들이 아침 6시까지 기다리던 사이에 일종의 반칙을 한 셈이다. 이에 대기자들의 민원이 쏟아지자 경비원이 병원 접수처에 “1번 번호표는 부정한 번호표이니 접수해주지 말라”는 의견을 전달하면서 논란이 일단락됐다고 한다.
또 새벽에 병원 건물에 출근하는 청소 아주머니들을 따라 몰래 병원 건물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다가 적발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규정상 병원 문을 아침 6시부터 열어주는데, 그사이에 몰래 병원 건물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은 것이다.
지금은 아침 6시부터 번호표를 뽑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번호표 기계가 밤새 켜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 보니 일찍 온 사람이 번호표를 여러 장 뽑아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고, 이 때문에 실랑이도 여러 차례 벌어졌다고 한다. 결국 이같은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아침 6시부터 현장 접수’ 체계가 자리 잡았다.
한 대기자는 “새벽부터 나와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앞사람이 번호표를 여러 장 뽑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칼부림이 날 것”이라며 “번호표를 두고 살벌한 분위기가 있었다”고 전했다.
경비원도 최근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경비원은 “최근에 6시 7분에 오신 분이 28번 번호표를 뽑고는 ‘내가 왜 28번이냐’고 따져서 당황스러웠다”며 “새벽부터 기다리던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고 이미 떠난 상황을 모르고는 속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전 5시 10분이 되자, 건물 외관에 불이 들어왔다. 이어 경비원이 자동문을 열고 나와 “들어오세요”라고 익숙하게 공지했다. 17명의 대기자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캠핑 의자와 짐을 주섬주섬 챙겨 건물 내부 1층에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오전 6시까지 건물 1층 내부에서 기다리는 시간이다. 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건물 벽을 따라 순서대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대기자들은 계속 늘어났다. 불이 켜진 건물 내부로 들어온 대기자들은 들어올 때마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기가 끝인가요”라고 물으며 눈치껏 차례대로 줄을 섰다. 건물 내부에 총 세 줄이 형성됐는데, 초기 10명 정도가 선 첫 번째 줄은 대부분 캠핑 의자를 깔고 앉았다. 다음 줄에 있는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 캠핑족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번호표 배포 2분 전, 오전 5시 58분. 사람들이 갑자기 캠핑 의자를 접으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번호표 기계는 건물 2층에 있다. 오전 6시가 되자 경비원이 2층에 올라가도 좋다고 알렸다. 1등 대기자를 따라 줄줄이 2층에 올라가 불 꺼진 병원에 놓인 번호표 기계의 전원을 켜고 순서대로 번호표를 뽑았다. 이날 오전 6시 이전 대기자는 총 29명이었다. 딱 1분 만에 29번까지의 번호표가 모두 뽑혔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정식 접수는 오전 8시 20분 시작이다. 번호표를 뽑은 이들은 접수 시간에 맞춰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각자가 희망하는 의사 선생님의 진료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새벽에 무표정한 얼굴로 홀로 자리를 지켰던 대기자들은 이번에는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다시 모여들었다. 물론 퀭한 눈이었지만, 얼굴에는 약간의 온기가 더해져 있었다. 진료실마다 아침부터 대기자가 수십명씩 늘어서기 시작했다. 드디어 새벽부터 기다려온 진료가 시작됐다.
글·사진=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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