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마저 울먹이자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최정규 기자]
▲ 지난 5월 12일, 춘천지방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기뻐하는 피해자 및 가족들 |
ⓒ 동해안납북귀환어부피해자모임 |
지난 12일 오후 2시, 춘천지방법원 102호 재판정에서 진행된 납북귀환어부 32명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춘천지방검찰청 윤성호 검사는 최종의견을 개진하기 전에 개인적인 소회를 밝혔다. 이날 윤 검사는 귀가 잘 들리지 않은 피고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잠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검사마저 울먹이자 법정은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날 공판에서 검사는 32명 피고인 전부에게 무죄를 구형하였고 형사 1부 재판부(재판장 심형근)도 이례적으로 당일 오후 4시로 선고기일을 지정하여 32명 전부에 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업 중 납북되어 수년 동안 북한에서 고초를 당하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어부들에게 쓰인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1만 8500일 만에 벗겨진 것이다.
50년 넘게 숨죽여 지냈던 생존 피고인 20명과 이미 세상을 떠난 피고인 12명의 가족들은 무죄 선고를 받은 후 환한 미소로 만세를 불렀다. 이례적으로 개인적인 소회까지 밝히며 울먹인 윤성호 검사에게 피고인들이 찾아가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십 년의 한이 1만 8500일 만에 풀렸다.
검사가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처럼 진실규명과 명예 회복인 '무죄선고'까지 너무나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
피해자들이 진실규명 위한 증거 찾아나서
동해안납북귀환어부 피해자모임 대표인 김춘삼씨를 비롯한 제2승해호, 승운호, 제6해부호 등 납북귀환어부들이 재심을 청구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1월이다. 그러나 법원의 절차는 6개월 동안 지연되었고, 결국 7월 13일 피해자들이 길거리에 나가 신속한 재심절차 진행을 촉구한 뒤에야 재심 심문기일이 지정되었다.
작년 9월 7일 어렵게 지정된 재심 심문기일, 이제는 검찰이 걸림돌이 되었다. 심문기일까지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던 검찰은 법원의 독촉이 있고 난 후에야 부랴부랴 의견서를 냈다. 다른 재판에서는 재심 심문기일에 검사가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고 출석도 하지 않아 재판부가 실무관을 통해 검찰에 출석 여부를 문의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등 황당한 일의 연속이었다.
재심개시결정 이후 51년 만에 열린 재심 공판은 10분 만에 끝나 허탈한 피고인과 가족들이 예정에도 없는 기자회견을 개최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3월 31일 오전 10시, 검찰은 20명의 생존 피고인과 이미 고인이 된 12명의 피고인 가족들을 공판정에 출석시켜 놓고 아직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며 연기를 요청한 것이다. (관련 기사 : 10분만에 재판 끝... 피해자 두 번 울린 검찰 https://omn.kr/23cfg)
▲ 4월 14일, 검찰총장은 재심절차가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만전을 기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진정회신을 피해자모임 대표(김춘삼)에게 보내왔다. |
ⓒ 최정규 |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검찰은 무죄 구형하겠다는 의견을 법원에 제출했고, 대검찰청도 신속한 재심절차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라는 검찰총장의 뜻을 공문에 담아 피해자모임 대표에게 전달했다.
작년 2월, 납북귀환어부 982명에 대한 직권조사를 개시한 진실화해위도 피해자들의 애타는 마음을 더 끓게 만든 건 마찬가지였다. 대규모의 피해자가 발생한 집단사건이라 진실규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직권조사 개시 후 피해자들은 조사와 진실규명 순서를 기다리며 마음을 애태웠다.
결국 피해자들은 스스로 진실규명을 위한 증거를 찾아 나섰고, 그 당시 강원도경에서 작성한 자료들이 국가기록원에 비공개 문서로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보공개 청구와 법원 문서제출명령 절차를 통해 관련 자료를 확보해 법원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 불법구금 장소로 피해자들이 지목한 '해동여관' 관련 강원도경 비밀문서 |
ⓒ 국가기록원 |
저절로 주어진 선물이 아니다
피해자모임 김춘삼 대표 등 이날 모인 피고인들과 가족들은 재판을 마치고 무죄 구형을 한 검사와 무죄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감사를 표하면서 "인생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번 재심 무죄판결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법원의 재심절차지연, 검찰의 무성의한 태도와 직무유기, 진실화해위의 조사지연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피해자들은 직접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내고 국가기록원에 숨겨져 있던 비공개 자료까지 찾아내는 등 스스로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재심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겠다는 검찰총장의 약속까지 받아냈다.
32명 피고인들의 무죄는 저절로 주어진 선물이 아니다. 피해자들이 직접 쟁취한 것이다. 그래서 공판에 참석한 검사조차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울먹인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재심 무죄판결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권리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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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최정규 변호사는 공익법률지원센터 파이팅챈스의 구성원으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의 변론을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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