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모의 酒저리]양평맑은술도가, 한 잔의 국화 막걸리를 위하여
겨울국화 은은한 향 담은 막걸리 '동국이'
삼양주로 빚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맛 지향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 우리술로 이어질 것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인도의 승려 바수반두(Vasubandhu·320?~400?)는 세상 모든 것이 '인연화합(因緣和合)'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우리가 마주한 모든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상황까지도 우연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원인(因)과 간접적인 조건(緣)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시인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리도 울어대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렸다고 말한다. 시인도 시를 읽는 이들도 어느 하나 국화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인연을 거쳐 각자의 꽃을 피워내려는 우리들처럼 국화와 닮은 한 잔의 술을 빚어내기 위해 고뇌하는 양조장이 있다. 경기 양평 ‘양평맑은술도가’다.
양조가의 길로 향하는 사적인 술의 연대기
돌아보면 모든 것이 양조가의 길을 걷기 위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박수진 양평맑은술도가 대표는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를 거치며 매 시기 다른 술에 천착하고 마음을 주었다. 매 순간 매료되었던 술은 달랐지만 다양한 경험들이 모여 오늘의 그를 술도가로 만들었다.
술도가의 길을 걷고 있다 하여 처음부터 술을 좋아하고 즐겼던 건 아니다. 오히려 대학 시절까지 박 대표는 술을 경계하고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흐트러지는 모습이 싫어서였다. 그는 그 시절 자신의 역할을 술에 흠뻑 취한 친구들 사이에서 그들을 챙기고 집에 데려다주는 일로 기억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술에 탐닉하기 시작한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 종합상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상대적으로 다양한 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당시 일본인 상사들과 어울리며 위스키와 와인으로 술에 입문하게 됐고, 일본 출장도 잦았던 만큼 현지에서는 사케도 즐겨 마셨다. 박 대표는 “어린 나이에 또래보다 비교적 다양한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환경이었다”며 “해외 배낭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 나라에서만 마실 수 있는 술을 찾아 마시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술에 있어서 편견이 없다고 말한다. 다양한 술을 접하고 경험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고, 술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매력을 알아가는 기쁨도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중국의 고량주가 대표적”이라며 “처음에는 특유의 강한 향이 너무 고약했는데 중국술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부터 배우고 마시는 법을 알고부터는 완전히 빠져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양조가가 된 지금도 “많이 마셔본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다양한 술을 공부하고 즐기고 있다.
박 대표가 술 빚기를 업으로 삼게 된 건 ‘한류’와 관련이 깊다. 그는 우리 문화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만 마련된다면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거워졌고, 우리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박 대표의 열망도 덩달아 커졌다.
고민 끝에 닿은 결론은 ‘한국 술’이었다. 박 대표 본인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영역이기도 했고, 우리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지속된다면 그 관심은 우리 술로도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전통주 양조로 마음이 기울자 그때부턴 몸이 바빠졌다. 막걸리학교와 가양주연구소 등 전통주 교육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양조를 익혔고,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에서 양조학 석사과정까지 밟으며 실력을 쌓아 올렸다.
처음 양조장 후보지로 고려했던 곳은 제주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행지인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여유로움 가득한 기분 좋은 술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용문산 인근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양평을 몇 번 오가고는 이곳 풍광에 사로잡혀 이내 마음이 바뀌어버렸다. 그렇게 2019년 양평으로 내려왔고, 박 대표의 술 빚기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은은한 국화꽃 향기 가득한 막걸리 ‘겨울아이 동국이’‘겨울아이 동국이(동국이)’는 양평맑은술도가와 동의어에 가까울 정도로 양조장을 대표하는 술이다. 겨울 국화 ‘동국(冬菊)’에서 이름을 따온 동국이는 이름처럼 겨울 국화, 동국을 넣어 빚어 은은한 국화향이 특징인 국화 막걸리다. 박 대표는 이 술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의인화해 이름을 지었다.
국화가 박 대표의 눈에 들어온 건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양평으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군에서 진행한 귀농·귀촌 교육을 수강했다. 그곳에서 지역농산물로 전통주를 빚기 위해 양평으로 이주했다는 박 대표의 이야기를 들은 귀농인 한 분이 자신이 농사짓고 있는 국화를 넣어보는 건 어떻겠냐며 건넨 것이 동국이었다.
국화는 예로부터 양조용 향료로 널리 사용되던 꽃이었다. 하지만 국화 막걸리는 쉬이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향이 진한 막걸리의 특성상 은은한 국화향이 술 안에 우아하게 녹아들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이러한 연유로 박 대표 역시 처음엔 시큰둥했다.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국화를 넣어 막걸리를 한 통 빚었고, 친한 선배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한 잔을 마셨다.
기대 이상이었다. 두 사람은 눈이 동그라져 서로를 바라보았고 동시에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 순간 국화 막걸리를 제대로 빚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박 대표는 “너무나 기분 좋게 올라오던 국화향을 잊을 수 없다”며 “이 기분을 다른 이들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국화로 술을 빚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 길로 국화 막걸리 개발에 매진한 박 대표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레시피를 완성했고, 2021년 10월 동국이를 출시했다. 박 대표는 겨울 국화였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국화는 일반적으로 가을에 꽃을 피우지만 동국이에 사용되는 ‘황어자’는 추운 날씨에 늦게 꽃을 피우는 품종으로 가을 국화보다 향을 진하게 머금고 있어 막걸리 안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동국이는 발효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삼양주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맛을 지향한다. 박 대표는 “외국인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텁텁하지 않은 술을 만들려고 했고, 채주(술을 거르는 작업)도 손으로 직접 해 입에 남는 게 없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중간 바디감을 구현하기 위해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쌀누룩과 개량누룩, 재래누룩까지 세 가지 누룩을 적절히 사용했다.
박 대표는 재료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양조장 인근의 밭을 매입해 국화를 직접 재배하고 있는 농부이기도 하다. 그는 국화와 함께 메밀도 재배하고 있는데, 라인업에 다양성을 더해줄 메밀소주에 사용하기 위해서다. 양평맑은술도가는 지난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의 아들에게서 이름을 따온 메밀소주 ‘동이’를 처음 선보였다. 박 대표는 “올해는 메밀 수확량을 늘려 동이의 생산량도 끌어올릴 계획”이라며 “동국이와 더불어 대표 제품으로 키워볼 생각이고, 해외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니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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