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하게 매운 낙지볶음, 더 맛있게 먹는 법

임승수 2023. 5. 13. 11: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와인이 음식을 만나는 순간] 낙지볶음과 리슬링 트로켄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기자말>

[임승수 기자]

식재료로서의 낙지는 뭔가 한국인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이 산낙지를 우걱우걱 씹을 때 외국 관객들은 그렇게 기겁을 했다는데, 한국인들은 고놈 참 실하다며 초고추장이나 기름장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닌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그렇다면 미안하다만, 어쨌든 초등학생인 우리 집 막내는 생선회를 배달시킬 때면 산낙지회도 꼭 함께 주문하라고 성화를 부린다. 그 나이에 벌써 산낙지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칼로 탕탕 알맞은 크기로 손질되어 애벌레처럼 꼬물대는 다리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소녀라니. 대한민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발견되기 어려운 존재 아닌가.

어우렁더우렁 혓바닥이 아릴 매운 맛

낙지로 할 수 있는 요리의 종류는 뜨끈하고 감칠맛 도는 연포탕, 낙지·곱창·새우의 대환장 콜라보가 끝내주는 낙곱새, 몸살 감기엔 어김없이 떠오르는 낙지김치죽, 낙지 본연의 끈끈한 생명력을 만끽할 수 있는 산낙지회(낙지탕탕이) 등 다양하다. 하지만 낙지를 주요 재료로 활용하는 대표적인 요리는 뭐니 뭐니 해도 매콤한 고추장 양념에 갖가지 채소를 함께 볶아내는 낙지볶음이다.

내가 낙지볶음에 제대로 빠지게 된 장소는 서울 종로구에 있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낙지볶음에 소시지와 베이컨을 함께 데워서 먹는다. 워낙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 그런지 식사 시간쯤에 방문하면 자리마다 즉시 조리가 가능하도록 미리 세팅되어 있다.

불판 위에 얇은 쿠킹 포일이 놓여있고, 쿠킹 포일 바닥에는 베이컨이 낮은 포복 자세로 바짝 붙어 있다. 그 위로 고봉밥처럼 차곡차곡 소시지, 감자, 파, 양파, 콩나물 등 식재료가 쌓여있는데 자신을 흡입해줄 손님을 다소곳이 기다린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주문하면 금세 낙지볶음, 소시지 찍어 먹을 빨갛고(케찹) 노란(머스타드) 소스, 그리고 공깃밥이 나온다. 낙지볶음 접시를 집어 들어 예의 고봉밥 비스무리한 녀석 위에 부어버리고서는 가스버너의 불을 켠다.

이내 식재료로부터 물이 스며 나오고 콩나물과 채소의 숨이 적당히 죽으면 요리조리 뒤섞어준다. 딱 봐도 맛있을 게 분명할 정도로 양념 색이 고루 배어들면 적당히 불을 줄인다.

이제 젓가락을 들고선 탱글탱글한 소시지를 하나 집어 들어 빨갛고 노란 소스에 쿡 찍어 한입 베어 문다. 흐헤후호호. 갓 데워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시지가 갑작스레 혀와 만났을 때 반사적으로 나오는 소리다.

움찔하는 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입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소시지 덕분에 구강 가득 따스한 온기가 조성된다. 입안 온도가 올라가는 만큼 소시지 온도는 적당히 하강하는데, 그때부터 꼭꼭 씹어서 넘기면? 그거참 맛있구먼.

이제 낙지 차례다. 고추장 갯벌에서 이제 막 기어 나온 듯한 붉은 색에, 가지런히 도열한 동그란 빨판이 시각적으로 침샘을 자극한다. 손가락 굵기만 한 녀석을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는다. 식감에서조차 끈끈한 생명력이 느껴지는데, 질끈 파고든 치아를 탱글탱글한 반발력으로 냅다 밀어낸다.

이놈 봐라? 짓이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근잘근 씹어주면 달짝지근한 감칠맛과 매콤한 양념 맛이 어우렁더우렁 혓바닥이 아릴 정도로 전해진다. 아플 정도로 얼얼함이 느껴지면 미지근한 콩나물국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켜준다. 캬! 쥐기네!

매운 맛의 통증을 완화시키는 리슬링의 시원함 
 
▲ 낙지볶음과 리슬링 이 조합을 경험하면 소주 생각은 싹 달아난다.
ⓒ 임승수
 
이쯤 되면 대개 차갑고 쓴 소주를 떠올리겠지. 하지만 와인 애호가인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드라이(달지 않은) 리슬링이 생각난다.

청포도 품종인 리슬링은 독일, 프랑스 알자스 지역에서 주로 재배된다.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고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쨍한 신맛과 달큼한 잔당감의 조화가 일품이다. 당도를 높여 스위트 와인으로 양조하기도 하는데,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은 애호가들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낙지볶음과 드라이 리슬링은 내가 경험한 다양한 조합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낙지볶음에서 와인을 떠올리는 이는 드물겠지만, 누군가 이 조합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소주 생각은 싹 달아나리라 확신한다.

리슬링은 화이트와인이라 시원하게 마시는 술이다. 제대로 매운 낙지볶음이 왕림하신 구강 내부는 미각 세포들의 비명 속에 통증이 생성되는데, 리슬링의 시원함이 일차적으로 이 통증을 완화한다. 이어서 신선한 산미와 함께 상큼한 복숭아, 사과, 감귤 향이 구강과 비강 안에서 퍼져나간다.

뒷맛에서는 은은한 잔당감이 낙지볶음 매운맛의 여운과 오버랩되며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두 맛의 어울림이 재미로도 미학적으로도 참으로 인상적이다. 리슬링에 특유의 이 잔당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매운 음식을 먹고선 뜬금없이 시큼한 레몬을 한입 베어 무는 행위처럼 생뚱맞고 당혹스러운 조합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드라이 리슬링을 무척 좋아하신다. 어머니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 건너오셔서 우리 부부와 함께 와인을 드신다. 얼마 전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준비한 와인이 있었다.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브론즈락 리슬링 트로켄이다. 무슨 암호문 같다고?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는 와인 회사명, 브론즈락은 제품명, 리슬링은 포도 품종, 트로켄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달지 않은 와인이라는 의미다. 와인 해외직구 사이트로 유명한 위클리와인에서 약 3만 8000원의 가격으로 구입했다.

낙지볶음은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배달이 가능한 인근 음식점 중에서도 맛이 괜찮아 종종 주문하는 곳이다. 일부러 신경 써서 리슬링과 낙지볶음의 조합을 준비했는데, 어머니가 드시더니 너무 맛있다며 활짝 웃으신다. 역시 한국인의 입맛에 최적화된 꿀조합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너무 벌컥벌컥 드시는 바람에 한 병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낙지볶음에 맞는 리슬링은 따로 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어머니 이렇게 셋이서 와인 한 병이면 아쉬울 만도 하지. 어머니의 강력한 요청으로 셀러에 보관 중이던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겔블락 리슬링 트로켄을 추가로 열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와인이지만 브론즈락보다는 한 등급 아래의 와인이다. 약 3만 원의 가격에 구입했다. 브론즈락보다 대략 8000원 정도 싸다.
 
▲ 8천원 차이가 나는 두 와인 왼쪽이 브론즈락, 오른쪽이 겔블릭이다. 브론즈락이 8천원 더 비싸다.
ⓒ 임승수
어머니와 아내가 8000원 저렴한 와인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는데, 이구동성으로 브론즈락과 비교해 아쉽다고 한다. 만약 겔블락 단독으로 마셨다면 그것대로 맛있었을 텐데. 앞으로는 8000원 더 보태서 브론즈락을 사야겠구나. 솔직히 내 입맛에도 제법 차이를 느꼈다. 8000원의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의 입이 참으로 섬찟할 뿐이다.

이 글을 읽다가 입에 침이 고여서 지금 당장 낙지볶음 주문하고 리슬링 사 와서 마셔야겠다고? 잠깐! 유의할 사항이 있다. 라벨에서 '리슬링Riesling'이라는 명칭만 확인하고선 무턱대고 구매하면, 간혹 은은한 잔당감이 아닌 과한 단맛에 당황하게 된다. 리슬링마다 당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도가 높은 리슬링은 일반적인 음식보다는 달달한 과일이나 디저트에 곁들여야 궁합이 맞다. 그렇다면 낙지볶음 같은 음식에 어울릴 드라이 리슬링을 골라낼 방법이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라벨에서 'trocken'이라는 독일어를 찾는 것이다. 이 단어는 영어로 치면 'dry'에 해당하며 달지 않은 와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라벨에 따로 trocken이라고 적혀 있지 않은 드라이 리슬링도 종종 있다. 그러니 라벨의 알코올 도수를 확인하자. 12%가 넘는 경우는 대체로 드라이 와인으로 판단하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알코올 도수가 리슬링의 당도를 판단하는 지표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효모의 작용으로 당 성분이 알코올로 변환되는데, 발효가 많이 진행될수록 당도는 낮아지고 알코올도수는 높아진다.

반대로 발효가 적게 진행되면 상대적으로 당도는 높고 알코올 도수는 낮다. 그러니 12%가 넘을 만큼 알코올 도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발효가 많이 진행되어 당이 대부분 알코올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실수 없이 드라이 리슬링을 고를 수 있으니, 행복을 위해 와인 매장으로 가셔도 좋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