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법률가 돼달라" 檢총장의 당부…김종인 조부도 있었다

김준희 2023. 5.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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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 검찰총장(오른쪽)이 지난 9일 전북 전주시 덕진공원에 있는 '법조 3성(聖)' 동상 앞에서 문홍성 전주지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법조 3성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검찰의 양심'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 '사도 법관'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을 일컫는다. 모두 전북 출신이다. [연합뉴스]


이원석 "법조가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 9일 직원 격려차 전주지검을 찾았다. 전주지검은 현재 문재인 전 대통령 전 사위 취업 특혜 의혹을 수사 중인 곳이다. 이 총장의 ‘입’에 관심이 쏠렸던 이유다. 이 총장은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인 만큼 원론적 수준의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검찰 구성원을 향해선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이런 법률가’가 돼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런 법률가란 ‘법조 3성(聖)’을 말한다. 검찰 밖에선 “3성으로 메시지를 대신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일부 나온다.
법조 3성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과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이하 존칭 생략)이다. 모두 전북 출신(각각 순창, 김제, 익산)이다. 3성의 유지를 기리려 1999년 11월 전주 덕진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이들의 주요 일생은『한국 사법을 지킨 양심 김병로·최대교·김홍섭』에 잘 담겨 있다.
가인(街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헌법을 수호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그는 "사법부 독립의 초석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포토]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퇴임 기념 사진. [사진 법조삼성 평전 간행위원회]


"김병로, 사법부 기틀 확립"…김종인 조부


이 책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김병로(1887~1964)는 일제 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며 김상옥 의사 등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다. 정긍식 서울대 법대 교수는 “해방 후엔 대법원장으로서 사법부 기틀을 확립하고 입법가로 활동했다”고 평가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김병로 손자다. 김 전 비대위원장은 2021년 2월 4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법관 탄핵 추진에 침묵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해 “선배 법관으로서 후배들에게 창피하지도 않냐”며 조부 일화를 꺼냈다.

그는 “1956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법관들과 마찰이 생기자 국회 연설을 통해 법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며 “이에 대해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답하며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서며 헌법적 가치인 사법부 독립을 지키려 한 것이다.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 천주교 세례명이 '바오로'인 그는 "법의 속에 성의를 입은 법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합뉴스]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 생전 모습. [사진 법조삼성 평전 간행위원회]


김홍섭 "법관은 찌든 현실 꿰매는 역할"


김홍섭(1915~1965)은 법관 임무를 “바늘과 가위와 풀을 가지고 찌든 현실, 유린당한 규범을 꿰매고 붙여 나가는 역할”이라고 봤다. 현실 문제를 일시에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할망정 시의적절한 방식으로 정의를 회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게 법관 사명이라는 취지다.

그는 피고인 말을 무시한 채 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이른바 ‘조서 재판’ 폐단을 질타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법관도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무지와 자만에 빠져 있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천주교 신자였던 김홍섭은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렸다. 판사 재직 때 세 가지 근무 수칙을 세웠다고 한다. 직장이나 동료에게 폐가 되거나 불명예를 끼치는 일은 한사코 하지 않겠다든지, 특권 의식을 부리지 않겠단 다짐 등이었다.
화강(華岡)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 '법을 통한 정의 구현'을 사명으로 삼았던 그는 "정치적 중립과 사법부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포토]
전주지검장 시절 최대교(가운데 앉은 이) 검사. [사진 법조삼성 평전 간행위원회]


최대교 "청렴하기에 강직할 수 있다"


“청렴하기 때문에 강직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긴 최대교(1901~1992)는 ‘대쪽 검사’ 원조다. 1933년 일제 강점기 때 검사로 임용된 그는 조선인 절도 피의자를 때려 숨지게 한 일본인 순사를 기소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법무국을 통해 기소 중지 압력을 넣었으나 최대교는 공소장과 함께 자신의 사표도 함께 올려 기소 의지를 관철했다.
일각에선 최대교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12년가량 검사를 지낸 이력 등을 놓고 친일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가 민족 탄압에 앞장섰다는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2015년 당시 박형남 전주지법원장(현 서울고법 부장판사 겸 사법정책연구원장)과 이창재 전주지검장(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등 '법조삼성 평전 간행위원회'가 발간한 『 한국 사법을 지킨 양심 김병로·최대교·김홍섭 』. 법조 3성 삶을 조명했다. [사진 법조삼성 평전 간행위원회]


"3·15부정선거 가담 검사 20여명 적발"


최대교는 1949년 서울지검 검사장 때 이승만 대통령 총애를 받던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사기·수뢰 등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건으로 후배 검사들에게 ‘강직한 검사’라는 귀감이 됐다. 4·19혁명 후인 1960년 5월 서울고검 검사장으로 복직한 뒤엔 3·15부정선거에 가담한 검사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수사반을 꾸려 검사장급 4~5명을 포함해 간부급 검사 20여 명을 적발했다.

1964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변호사 생활을 한 그는 서울 아현동 자택에서 영등포 변호사 사무실까지 버스로 출근했다. 6.6㎡(2평) 남짓한 사무실엔 철제 책상 1개와 낡은 캐비닛 1개, 다이얼식 전화 1대,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심지어 선풍기도 없었다. 사무장을 둘 형편도 못 돼 전화도 본인이 직접 받았다고 한다. 최대교는 1992년 『월간중앙』 12월호 인터뷰에서 “돈벌이에 급급해서는 법을 올바로 따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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