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파∙막가파 잡던 '범단죄'…이젠 전세사기∙마약 겨냥한다
최근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는 전세사기 사건과 마약 사건에 자주 보이는 죄명이 있다. 바로 ‘범죄단체조직죄(범단죄)’다. 경찰은 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주택 533채의 전세보증금 430억원을 가로채고 그 결과 피해자 3명이 스스로 사망한 ‘인천 건축왕’ 사건에 이 혐의를 적용했다. 전세사기에 범단죄가 적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종수 국가수사본부장이 직접 나서 “조직적 전세사기에 범단죄 적용을 적극 검토하라(4월 20일 전국 수사지휘부 화상회의)”고 지시한 만큼, 이를 시작으로 각종 전세사기에 범단죄가 적용될 가능성이 커졌다.
서울 대치동 마약음료 사건에도 범단죄가 적용됐다. 경찰 수사 결과 일당은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해온 보이스피싱 점조직으로 밝혀졌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였어도 ▶다수가 지속적으로 ▶공동의 범죄 목적을 갖고 ▶수 개월에 걸쳐 역할을 분담하고 통솔 체계를 지니는 등 범단죄를 적용할 여지가 충분했다는 점이 지적됐다. 지난 11일 인천경찰청도 베트남에서 엑스터시 등 22억원 상당의 마약류를 들여와 국내에 판매한 일당 76명 중 주범 6명을 범죄단체로 봤다. 인천청은 “이후 유사한 마약 밀반입을 범단죄로 처벌할 기틀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최근 경찰 내부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이른바 ‘건폭(건설폭력)’으로 명명한 건설노조의 공사현장 내 채용강요·금품갈취 등에도 범단죄를 적용할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실무자들 사이에서 “노조의 탈을 쓴 조직적 폭력범죄”란 찬성론과 “강요·폭행이 동반됐을지언정 목적은 경제(노조)활동”이란 반대론이 대치한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이 범단죄를 적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벌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일반적인 사기나 마약 혐의에 범단죄가 더해지면 경합범으로 형량이 높아지고, 원래라면 개별적으로 따졌어야 할 범죄수익을 한 번에 몰수·추징하기 쉬워 피해자 구제가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조폭 잡던 죄에서 범죄 트렌드 읽는 열쇳말로
폭처법상 범단죄는 과거 조직폭력배를 잡던 대표 혐의였다. 1990년대를 휩쓸었던 연쇄살인 조직 지존파나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모티브가 된 막가파 등이 이 죄로 처벌받았다.
형법상 범단죄는 2015년 대구지검이 보이스피싱 사건에 적용한 것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2020년대를 전후해 보이스피싱, 중고차 사기, N번방, 코인 다단계 등 주목도 높은 사건들에 차례차례 적용되기 시작했다. 검·경할 것 없이 형량을 늘리고픈 수사기관의 ‘기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범단이 개입된 사건은 대체로 피해 사건이 다수고, 수법이 고도화·조직화됐다는 점에서 당대 사회문제를 읽는 열쇳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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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범죄단체, 가벼운 범죄집단
이처럼 형법상 범단죄가 화제 사건에 자주 쓰이다 보니, 수사기관은 조직의 무게에 따라 ‘범죄단체’와 ‘범죄집단’을 구분해 사용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강남 마약음료 사건이 보다 가벼운 범죄집단을 채택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범죄단체는 최소한의 통솔 체계 등 규명해야 할 요건이 많지만, 범죄집단은 범죄를 계획·실행할 조직적 구조만 갖추면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잇따른 범단죄 적용에 따른 부작용 우려도 있다. 김대근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실장은 “범단죄는 특히 사회적 비난의 표적이 되는 사건에서 수사기관이 각각의 공범이 행위에 가담하는 정도나 역할의 차이를 입증하기 어려울 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며 “최근 판례를 보면 과거엔 범단죄를 긍정한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부정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애써 범죄단체로 의율하더라도 법원 단계에서 깨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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