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人사이드]연극배우가 된 96세 간병인과 그를 발탁한 40대 요양보호사

전진영 2023. 5. 13. 09: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0대 감독이 노인 위한 무대 만들고
96세 배우는 대본없이 인생을 연극으로

일본의 사회문제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저출산과 고령화입니다. 한국이 곧 따라잡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인구감소가 더 일찍 시작됐기 때문에 상황이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서는 이 때문에 '잘 늙는 법'을 다룬 기사가 자주 보도되곤 합니다. 얼마 전에는 96세의 나이에 연극배우로 무대에 오르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화제가 됐습니다, 이분은 무려 80대에 데뷔했습니다. 전직 배우 출신의 40대 요양보호사가 매의 눈으로 인재를 알아본 것인데요. 오늘은 노인 배우와 청년 감독, 이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연극 이야기를 소개해드립니다.

두 사람은 간병인과 요양보호사의 자격으로 처음 만나게 됩니다. 지금은 96세 간판 배우가 된 오카다 타다오씨는 당시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간병인이었습니다. 감독인 스가와라 나오키씨는 전직 배우로, 요양 보호사로 일을 하며 노인 요양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일본 지방만 가더라도 사람이 없어 노인이 노인을 돌봐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스가와라 나오키 감독(왼쪽)과 오카다 타다오 배우.(사진출처=오이보케시 페이스북)

꿈을 접고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스가와라씨는 현장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알려 드려도 치매에 걸린 노인이 자신을 볼 때마다 계속 "시계방 아저씨 맞죠?"라고 말했기 때문인데요. "아닙니다. 저는 다른 사람입니다"라고 딱 잘라 말을 했을 때 환자의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느끼게 됩니다. 이후에는 "네, 제가 시계방 아저씬데요"라고 하며 연기를 하며, 어딘가의 기억을 떠돌고 있는 노인에게 이를 맞춰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스가와라씨는 '노인 요양 현장에 연극의 지혜를, 그리고 연극의 현장에 노인들의 깊이를'이라는 이념 아래 고령자와 간병인과 함께 만드는 연극 공연, 그리고 치매 관리에 연극의 개념을 도입한 워크숍을 개발하게 됩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병간호하던 당시 88세 오카다씨도 이 워크숍 공고를 보고 접수를 하러 갑니다. 처음에는 말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고, 막무가내인 할아버지인 것 같던 오카다씨는 연극을 접목한 워크숍이 시작되자 살아난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치매 병간호에 지치고 예민해진 할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어릴 적 배우를 꿈꿨고, 엑스트라로 출연을 했을 정도로 연기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스가와라씨는 이에 오카다씨를 전격 등용, 극단 '오이보케시'를 창단하게 됩니다. 오이보케시라는 이름은 일본어로 '늙음'을 뜻하는 단어 오이(老い), 나이가 들어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뜻하는 단어 보케(惚け),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 시(死)를 합쳐 만들었습니다.

오카다 타다오 배우(왼쪽)가 무대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사진출처=오이보케시 페이스북)

연극 아이디어는 오카다씨와의 대화를 통해 얻는다고 합니다. 극단이 처음으로 올린 연극도 "이상하게 아내가 자꾸 새벽에 혼자 어딘가를 나가서 걷고 온다. 곤란하다"는 오카다씨의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졌는데요. 치매에 걸린 아내가 사라졌으니 도와달라는 노인의 부탁을 받아들인 청년이 노인과 함께 상가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의 연극입니다.

오카다씨는 이제 눈도 침침해 대본도 볼 수 없는 상태기 때문에, 스가와라씨는 오카다씨가 자주 하는 이야기들을 대본에 넣었다고 합니다. 연습 때도 대본을 주지 않고 현장에서 대사를 맞춘다고 하네요. 그래도 오카다씨는 즉흥 연기로 모든 것을 해낸다고 합니다. 그는 "내일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고, 언제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타고난 무대 체질인 것 같다"며 "무대는 생명이고 영혼"이라고 말하는데요.

간판 배우는 오카다씨지만 연극에는 실제 치매 환자부터 보호자, 장애인 등 다양한 사람이 무대에 함께 오릅니다. 치매 환자가 보호자인 남편과 손을 잡고 나와 연기를 하고 춤을 추기도 하는데요. 스가와라 감독은 "간병 일을 하면서 중요하다고 실감한 것은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노인에게 맞는 역할을 찾아줘야 한다. 그 사람의 인생에 귀를 기울이고 상태를 파악해 맞는 역할을 찾고 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발견하면 노인이라도 갑자기 빛이 나기 시작한다. 치매라고 해도 간병인이 놀랄 정도의 신체 능력이나 인지 기능을 발휘할 때도 있다"며 "누워만 있던 치매 할아버지도 라디오 체조 음악이 나오자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더라. 알고 보니 치매에 걸리기 전 체육 교사로 일을 했다고 한다"고 회고했습니다. 아이를 다 키워 떠나보내고 정년퇴직을 하면서, 역할을 빼앗겼던 노인들이 다시 역할을 맡게 되며 삶의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는 27일 열리는 오카다 타다오 배우 주연의 연극 포스터.(사진출처=오이보케시 홈페이지)

이렇게 서로의 인생 2막을 열어준 두 사람, 이달 말에 또 공연을 앞두고 있는데요. 새로운 도전도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카다씨는 최근 스가와라 감독에게 "살아 있을 때 상을 치르고 싶다"며 이와 관련한 연극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스가와라 감독도 "지금까지는 삶에 집착해 작품을 만들었지만, 죽음을 마주하는 것도 중요하다. 새 연극을 만들어나가겠다"고 답했는데요.

이렇게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함께 고민하는 96세 배우와 40세 감독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큰 울림을 선사했습니다. 세대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요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같이 잘 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