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석주 이상룡 선생을 찾아서
[김삼웅 기자]
▲ 석주 이상룡(1858~1932).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
ⓒ 독립기념관 |
국가의 존립이 무너지는 절망의 시기, 사방이 어둠에 덮여 한 줄기 빛도 찾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긴 세월 호사를 누려온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두렵지만 나서길 꺼리고, 같은 세월 갖은 착취와 학대를 받아온 백성들은 이가(李哥)나 왜가(倭哥)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체념으로 나서길 주저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의 국시라면 충(忠)과 효(孝)이다. 모든 사회적 가치·덕목·교육·예의·범절이 여기에 모아지고 두 글자로 압축되었다. 충은 특히 국가의 안위가 문제되었을 때 적용되는 예비용이지만 평시에는 군주에 대한 경애심이고, 효는 나날에 쓰이는 상비약처럼 가정의 윤리관이었다. 그런데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놓이면서 충은 삼십육계하고 효는 조상들 묫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론적이고 예외도 없지 않았다.
'암흑기의 선각' 또는 '호모 노마드(homo nomad)'라 불러 마땅한 사람(가족)들이 있었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양은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했듯이, 같은 전통유학을 배우고도 보수 유림의 낡은 외투를 벗어던지고 혁신유림으로 갈아입었던 사람들이었다.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은 붓 대신 무기를 들고 의병활동→애국계몽운동→친일파 송병준·이용구 등 처단 상소→해외망명에 나섰다. 노마드의 개척정신이 아니고는 실천이 어려운 도정이었다.
백면서생에게 의병이나 해외망명은 여간해선 감행이 어려운 결단이었다. 더욱이 단신이 아닌 가족·친척이 함께하는 망명은 쉽지 않다. 누대에 걸쳐 전승된 명문가의 기득권을 내려놓았고, 떠나기 전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노비문서를 불살랐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이다. 그리고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가족들에게 <거국시(去國詩)>을 읊었다.
산하의 보장(寶藏)인 삼천리 우리 강토
의관(衣冠)하는 유교문화 오백년 지켜왔네
문명(文明)이 무엇이기에 늙은 적(賊) 매개하여
까닭 없이 꿈속의 혼 온전한 나라 버리네
대지(大地)에 그물 펼칠 것 이미 보았거니
어찌타 영웅남자가 해골을 아끼랴
고향 동산에 좋이 머물고 슬퍼하지 말게나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
결행을 주도한 석주 선생은 뜨거운 피 펄펄 튀는 젊은 연세가 아니었다. 이미 쉰 고개를 넘어선 53세, 당시만 해도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이던 시절에 가솔 50여 명을 이끌고 망명객이 되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와 함께 서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이고 독립운동기관인 경학사에 이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대동역사>를 저술하여 그 지역 한인학교의 교재로 쓰이고, 대표적 독립운동가들과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조직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데 이어 베이징에서 신채호·박용만 등과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하고, 남만주 항일운동을 총괄하는 정의부를 설치하고, 난파 직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되는 등 선생은 항일투쟁의 중심에 섰다.
▲ 임청각 이상룡이 이 집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가족과 더불어 만주로 망명하자 일제는 민족정기를 끊는다며 집 바로 앞에 철길을 놓았다. 임청각은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
ⓒ 정만진 |
그의 고택인 경북 안동의 임청각은 일제가 기차 철도를 깔아 그 가문의 독립정신을 훼손시켰다. 문재인 정부에서 2025년까지 99칸 임청각의 원형을 살리고 임청각 출신들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을 시작했다. 공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임청각은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을 포함 11명이 독립운동의 서훈을 받았고, 석주 선생의 처가와 사돈집까지 하면 서훈자가 40여 명에 이른다. 그야말로 독립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선생의 훈격이 3등급이다. 이승만의 비서 출신인 임병직이 1등급이고, 또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의 높은 훈격에 비해 부끄러운 모순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망명하고, 각급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선생의 품성이, 까짓 훈격의 급수에 연연할 리 없겠지만, 역사정의와 일반상식에 비추어 정당한 처사가 아님은 분명하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정부가 나서 이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석주 이상룡은 반제항일·반봉건투쟁의 일환으로 의병전쟁을 시도하고, 아울러 신간서적을 통한 국제 안목의 확대로 애국계몽운동 등 구국운동을 실천에 옮겼으며, 또 한편으로는 종래 유자들의 사대사상의 바탕 위에서 구국이라는 대의 앞에 종래의 존화양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한 그는 당시 한국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유교의 사대주의적인 사고에서 탈피하였는데, 이는 후일 조국광복을 위하여 석주 일가가 중국동북지방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결단력과, 그 지역에서 중국을 비판하면서 재만한국인촌락 형성에 대한 지도와 독립운동을 적극 수행할 수 있었던 연유가 된다고 하겠다. (주석 1)
주석
1> 박영석, <석수 이상룡의 화이관>, <민족사의 새시각(개정증보판)>, 55쪽, 탐구당,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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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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