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발칙한 상상
칼럼니스트인 클레어 안스베리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다양한 삶의 전환점을 주제로 한 ‘터닝포인트 칼럼’을 주로 쓴다. 지난달 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올라온 그의 칼럼 제목은 ‘젊은이들 사이의 놀라운 믿음의 급증’이었다.
비영리단체인 스프링타이드 연구소가 지난해 말 18~25세 젊은 층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응답자의 약 3분의 1이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higher power)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2년 전 조사 결과(약 4분의 1)보다 확연하게 증가한 수치다. 특이한 점은 설문 과정에서 ‘초자연적 힘’과 같이 기독교나 특정 종교가 연상되지 않도록 하는 표현을 문항에 넣어 사용했다는 점이다. 안스베리는 “많은 젊은이가 어릴 때부터 접한 신의 이미지나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적 신을 믿지 않더라도 더 강한 어떤 존재의 힘 내지는 자비로운 존재가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예컨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진 않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그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이미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사는 미국의 ‘청소년과 종교에 관한 연례보고서’ 중 일부인데, 신적 존재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은 3년여간 코로나 팬데믹 때 경험한 상실감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여기서 의미하는 상실은 당시에 잃은 가족과 친구, 직장이나 소중했던 일상일 것이다. 그러면서 안스베리는 “팬데믹은 청년들을 여러모로 성숙하게 했으며, 이전 세대가 비극 가운데 갈망했던 위로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고도 했다.
‘초자연적인 힘’과 ‘상실감’ ‘위로’ 같은 생각과 정서가 MZ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기독교나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응답하는 젊은 층의 비율은 매년 떨어지고 있는 반면 특정 종교가 아닌 초월적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 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젊은이들이 종교의 교리는 거부하고 있지만 나름 삶의 의미와 진리, 소속감을 찾느라 분투하고 있다는 얘기로 읽힌다.
며칠 전 이단사이비 대처 전문가 A씨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요즘 이단사이비 단체를 탈퇴했거나 탈퇴를 망설이는 이들을 대상으로 전문가팀을 꾸려 몇 주간에 걸쳐 상담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 ‘나는 신이다’ 다큐멘터리로 논란의 중심에 떠오른 기독교복음선교회(JMS) 탈퇴자를 비롯해 신천지 신도 등이 여럿 있다고 했다.
A씨가 국내외 이단사이비 단체 연구물을 분석하고 이단사이비 신도들을 상담하면서 발견한 특징은 그들 상당수가 ‘중독’과 ‘세뇌’의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이단사이비에 빠져 있는 이들 중에는 결핍에서 비롯된 과도한 의존이 결국 빠져나오기 힘든 중독 증세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잘못된 교리에 세뇌당하면서 그 늪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얘기도 있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대학생이 서울 지리도 모르고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천사 같은’ 선배를 만나 몇 년 따라다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신천지 신도가 돼 있더라는 것이다. 소속감이 없던 그에게 공동체(신천지)를 만나게 해주고, 외로움을 달래주며(위로),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으로 고민해오던 삶의 의미와 진리(신천지 교리)까지 가르쳐준 셈이다.
그 젊은이가 갈급해하는 마음을 기가 막히게 헤아려준 주인공이 다름 아닌 이단사이비라는데 A씨도 나도 허탈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교회 정문마다 붙어 있는 ‘신천지 OUT’ 같은 이단 경계 포스터가 불쑥 떠올랐다. 한국 교회가 이런 이단들 경계하고 저런 사이비들 조심하라고 방어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닐까. 젊은 친구들이 막연하게 찾고 있는 자비로운 존재가, 그들 얘기에 충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픈 곳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메신저가 당신네 집 앞 동네교회에 있다고 좀 자랑질해도 되지 않을까. 너무 발칙한 상상인가.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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