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게으름이라는 안식처

2023. 5. 13.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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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아, 일주일 전에는 존재도 몰랐던 놈하고 결혼하란다. 죽고 싶다.” 화가 김점선이 이십대일 적,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친구의 사연을 들은 그녀는 안 그래도 사는 일이 지겨웠던 터라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나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돌연, 죽기 전에 그림 한번 실컷 그려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 미술학원에 등록했고 그렇게 화가가 됐단다. 아침 햇살에 마지못해 눈을 뜨는 요즘, 내가 하는 일들이 아무런 쓸모없이 느껴지는 나날. 그렇다고 죽어버릴 순 없으니 그녀처럼 죽도록 그림이라도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 칼을 휘두르듯 붓질을 하면 가슴이 뻥 뚫릴 것만 같다, 라고 생각한 지 석 달 하고도 보름이 다 돼 간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월셋집에서 화가 행세를 하다가 벽지에 물감이라도 튀면 큰일이니 작업실을 얻는 쪽이 속 편할 것이다. 하지만 “이 돈에 이런 매물 없을까요?” 하고 부동산에 물으면 “그 돈에 그런 매물이 어딨어요!” 하며 문전박대를 당할 테니 개 발에 땀 나도록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 뻔할 뻔 자. 그렇게 작업실을 얻었다고 치자. 그런데 갑자기 그림이 그리기 싫어지면 그 공간을 또 어찌 정리한단 말인가. 나처럼 게으른 인간에게 실로 가혹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게으름을 이겨내는 것과 답답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것 중 어느 쪽이 품이 덜 들까. 이리저리 재다가 후자를 택하고야 만 것이다.

이다지도 게으른 내가 마다하지 않는 일은 강아지를 봐달라는 언니의 부탁이다. 까만 눈과 촉촉한 코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시름이 다 잊힌다. 한달음에 도착한 언니의 집은 엉망이다. 여기저기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가지, 개수대가 넘치도록 쌓인 설거지거리, 화장대 위에 어지러이 놓인 뻘겋고 꺼먼 화장솜. 개점휴업 중이기는 하지만 한복 매장을 운영하며 박사 과정도 병행 중인 언니가 집안일에 손댈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러나 화장솜을 쓰레기통에 넣지 못할 정도로 바쁘지 않다는 사실은 더 잘 안다. 그런 언니에게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부으면 언니는 늘 이렇게 변명한다. “체력이 약해서 그래….”

언니는 체력이 약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난 체력이 약해서 집안일을 못해. 치울 기운이 없거든. 난 체력이 약해서 운동을 못해. 운동하고 나면 더 힘들거든. 난 체력이 약해서 만원 버스에 못 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면 어지럽거든. 날고기도 뜯어 먹을 것 같은 산적 같은 얼굴로 체력을 운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세상 어느 약골이 뒤로는 전공책이 든 가방을 메고 앞으로는 강아지를 안은 채 출근을 하고, 과제를 하느라 밤을 꼴딱 새웠음에도 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라탄단 말인가. 하지만 언니는 본인의 체력이 약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방패 삼아 각종 면죄부를 부여한다.

죄가 있다면 산적같이 생긴 죄밖에 없는 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한다. 밥풀이 말라붙은 그릇을 물에 담가 불리는 동안 옷가지를 주워 세탁기를 돌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를 줍는다. 그런 내 뒤를 졸졸 쫓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서려는 참에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이때다 싶어 고자질하니 “막내가 부지런하니까 좀 치워줘” 하는 타이름이 돌아온다. 강아지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길을 걷는데 엄마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제일 곱다고 한다지만 나더러 부지런하다니. 못 말려, 진짜.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의심도 든다. 어쩌면 나, 게으르게 사는 게 편하니까 스스로 게으르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엄정한 판사가 돼 자문자답해 본다. 게으름을 부리다가 마감을 어긴 적 있습니까. 아니요. 남의 살림을 거드는 게으름뱅이를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게으름을 이기지 못해 양치를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든 적은요. 이따금 있습니다. 부지런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게으른 사람 중 가장 부지런하군요. 이제 그만 게으름이라는 안식처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시기를 권합니다. 땅, 땅, 땅! 저 멀리 부동산이 보인다. 가볼까, 말까, 가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는데 “멍멍!” 뭘 그리 망설이냐고, 개 발에 땀 나도록 뛰어 보자고, 강아지가 응원하듯 힘차게 짖는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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