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 백지원 무대 복귀작 '벚꽃동산'…"120년 전 체호프극에 '내'가 있죠"

나원정 2023. 5. 1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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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연극 '벚꽃동산'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 연극 '벚꽃동산'이 지난 5일부터 28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맨오른쪽부터 백지원이 연기한 지주 라네프스카야와 이승주가 연기한 농노 출신 사업가 로파힌. 사진 국립극단

“‘벚꽃동산’은 뚜렷하고 간명한 사건은 없지만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하죠.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1860~1904)가 작고한 해 발표한 유작 ‘벚꽃동산’으로 연출 인생 30년 만에 처음 체호프극 연출에 도전한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말이다. 지난 4일 개막해 28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벚꽃동산’의 김광보 연출과 주연 배우 백지원‧이승주가 10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첫날 공연부터 호평 받으며, 전회차 전석이 매진됐다.
‘벚꽃동산’은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와 함께 체호프 4대 희곡에 꼽힌다. 주인공은 몰락한 귀족 지주 라네프스카야(백지원)다. 불운한 결혼생활 끝에 6년 만에 외국에서 고향에 돌아온 라네프스카야는 가문의 삶의 터전이었던 벚꽃동산을 잃게 될 만큼 가세가 기운 상황에도 씀씀이를 줄이지 못 한다. 라네프스카야 집안의 농노의 자식이자 자수성가한 사업가 로파힌(이승주)은 벚꽃동산을 별장으로 개조해 돈을 벌라고 조언하지만, 라네프스카야는 그가 자신의 수양딸 바랴(정슬기)와 결혼하길 바랄 뿐이다.


라네프스카야, 몰락 알고도 외면하는 비애 강조


국립극단 연극 '벚꽃동산' 기자간담회가 1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연출을 맡은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주연 배우 백지원, 이승주가 무대 세트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국립극단
기존 ‘벚꽃동산’ 공연들과의 차별점은 라네프스카야를 현실에 어두운 귀족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캐릭터로 그렸다는 점이다. 이번 연극에서 라네프스카야는 벚꽃동산을 잃게 될 걸 알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경이지만 늘 웃고 있다. 가면 같은 웃음 뒤에 깊어져 가는 불안과 상실을 그려내는 주연 백지원의 연기가 빼어나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최근 개봉 영화 ‘드림’ 등으로 대중에 각인된 백지원은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2018) 이후 5년 만에 무대에 복귀했다.
김 연출은 “‘벚꽃동산’의 기존 해석들은 제가 읽은 라네프스카야와 전혀 달랐다. 라네프스카야의 허황된 모습을 강조했더라.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의 정서적 흐름을 비극으로 봤다”고 말했다. 또 “백지원 배우의 장점은 호흡이 굉장히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역할을 하든 신뢰를 줄 수 있는 목소리다. 마냥 천진난만한 라네프스카야가 아닌, 무게감과 아픔이 있는 라네프스카야를 생각하자마자 그가 떠올라 출연 제안을 했다”고 덧붙였다.

'우영우''드림' 백지원 5년만에 무대 복귀


극 중 시대 변화의 이면엔 ‘사랑’이 강조된다. 백지원은 “라네프스카야는 사랑을 쫓는 사람이다. 모든 세상 가치가 사랑으로 해결된다고,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는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오면 사랑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큰 줄기를 잡고 연기했다”고 했다.
최근 영화, 드라마에서 활약한 배우 백지원이 '벚꽃동산'으로 5년만에 무대 복귀했다. 사진 국립극단
로파힌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의사 겸 작가가 된 체호프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그가 벚꽃동산의 몰락을 어떻게든 막으려 애쓰는 건 라네프스카야가 자신이 선망했던 ‘첫 여성’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지난해 연극 ‘세인트 조앤’ 이후 김 연출과 다시 뭉친 이승주는 “로파힌은 현실적 인물로 보일 수 있지만 누구보다 과거에 얽매여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농노였고 아버지에게 매를 맞던 코흘리개 아이였던 자신의 처지가 달라졌다는 기쁨, 동시에 라네프스카야를 향한 존경에도 매여 있다”면서 “제대로 사랑 받은 적이 없어서 사랑할 줄 모르는 인물”이라 해석했다.

배우 뒷모습 거울처럼 비춘 유리 저택


연극 '벚꽃동산'의 고정 무대인 유리 저택 세트는 박상봉 무대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냈다. 사진 국립극단
벚나무 한 그루 없이 유리로 만든 저택 세트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인물 간의 관계를 막힘없이 지켜보며 저택 밖 풍광을 상상하게 만든다. 박상봉 무대디자이너의 이같은 구상을 듣자마자 김 연출은 만세를 불렀단다. “공연 중 배우의 뒷모습이 강화 유리에 비쳐 보인다. 배우에겐 부담이지만, 뒷모습 연기까지 거울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 삶의 성찰


'벚꽃동산'에는 지주 라네프스카야와 두 딸을 중심으로, 농노 출신의 사업가,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의 가정교사, 초로의 하인, 거리의 사상가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사진 국립극단
‘벚꽃동산’의 마지막은 초로의 하인 피르스(박상종)가 장식한다. 벚나무 동산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귀족 가문이 번창했던 과거의 영광 속에 여전히 사로잡힌 피르스는 백발이 성성한 주인 마님들이 아직도 코흘리개 아이인 양 코트를 챙겨주기 바쁘다.
정신이 흐려져 가던 그는 텅 빈 저택에서 홀로 깨어나 “다 잠겼군”이란 혼잣말을 중얼댄다. 벚꽃동산이 그의 무덤이 되리라 짐작하게 하는 대사다. 김 연출은 체호프극을 권유 받고 ‘벚꽃동산’을 읽다가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에 꽂혀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 아무 것도 없군. 아무 것도...’라는 대사에서 인생의 성찰을 느끼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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