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직장인 퇴근 후 찾는 '이곳'...첫 주문 무조건 '맥주'인 이유 [쿠킹]
낯선 곳에서 맛보는 색다른 음식은 새로운 경험과 즐거움을 선물합니다. 한 끼도 허투루 먹을 수 없죠. 미식 여행을 즐긴다면 매주 금요일을 주목하세요. 도쿄의 다채로운 음식 문화와 요리 이야기를 담은 책『도쿄에선 단 한 끼도 대충 먹을 수 없어』의 에피소드 중 네 가지를 골라 미리 연재합니다. 도쿄 곳곳에 숨겨진 맛있는 이야기를 중앙일보 COOKING에서 만나보세요.
서서 먹고 마시는 술집을 가리키는 ‘다치노미야(立ち飲み屋)’는 에도 시대에 처음 생겼습니다. 서민들이 저렴하게 먹고 마시는 공간으로 에도 거리에 확산되다가 1940년대 초 주류 배급제, 1960년대 고도 성장기 등을 거치며 인기가 잦아들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전후 시작된 ‘쇼와 붐(쇼와 시대에 향수를 느끼는 분위기)’으로 다시 인기에 불이 붙은 이후 계속 확산 추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자카야(居酒屋, 선술집)의 인기를 추월한 지도 오래입니다.
다치노미야의 종류는 무궁무진합니다. 구시야키(串焼き, 꼬치구이), 어묵 등 가벼운 안주만을 파는 곳부터 와쇼쿠(일본식 식사) 전반을 파는 곳, 프렌치·이탈리안·중국·중동·지중해 요리 등 다국적 요리를 내놓는 곳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요리 종류를 망라합니다. 사시미 전문 다치노미야에서 리버무스(Liver Mousse, 소·닭 등의 간을 삶아 곱게 체로 거르고 생크림 등과 섞어 굳힌 요리), 리예트(Rillettes, 다진 돼지고기·거위 고기 등을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삶아 틀에 넣고 굳힌 후 빵 등에 발라 먹는 요리)를 팔기도 하고, 프렌치 전문 다치노미야에서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나 오므라이스를 팔기도 합니다. ‘뎀뿌라&와인’ 다치노미야, ‘교자&샴페인’ 다치노미야, ‘훈제 요리&위스키’ 다치노미야 등 특정 음식의 조합을 테마로 한 치노미야도 있습니다. 어느 다치노미야든 밝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합리적인 가격대의 요리를 즐기려는 ‘다치노미스트(タチノミスト, 다치노미야에서 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다치노미스트들이 가장 먼저 주문하는 것은 맥주입니다. 다치노미야가 밀집한 곳이 대부분 신바시, 긴자, 신주쿠 등 오피스 상권이다 보니 일이 끝난 후 상사나 동료, 혹은 지인들과 여럿이서 그룹으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에는 이렇게 여럿이 모였을 때 첫 잔을 서로 부딪치며 “간파이(乾杯, 건배)!”를 외치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 건배를 빨리해야 안주도 먹고 수다도 떨기 시작할 수 있는데, 많은 인원이 각기 다른 술을 주문하면 술을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첫 잔만큼은 맥주로 메뉴를 통일하는 겁니다. 내 음식이 늦게 나와서 남을 기다리게 하는 일이 폐라고 생각하는 일본인 특유의 오모이야리(思いやり, 배려)가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여럿이 찾는 경우가 많지만, 홀로 찾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주류 회사 마보로시노사케(幻の酒)의 2018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치노미야를 선택하는 이유로 ‘혼자 마음 편히 마시고 싶을 때’를 택한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다음이 ‘직장 동료가 아닌 친구나 지인과 편히 마시고 싶을 때’였습니다. 이처럼 다치노미야는 일본인이 부담 없이 한잔하고 싶을 때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나 2차로 잠시 들르는 곳이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가볍게 마시다 보니, 머무는 시간도 평균 40분에서 2시간 미만입니다.
에도 시대부터 서민의 공간이었던 다치노미야는 대로변보다는 뒷골목, 임대료가 저렴한 철로나 고가 아래 공간이 주 무대. 이런 공간이 궁색해 보일 수 있지만, 애주가에게는 지나가는 전철의 소음을 안주 삼아 술 한잔하는 것이 낭만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크래프트 비어, 와인 등 다양한 주류와 프렌치, 이탈리안 등 다국적 요리들을 썩 괜찮은 가격으로 맛볼 수 있으니, 도쿄의 귀한 미식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천 도쿄 다치노미야]
비스트로 알리고(ビストロ アリゴ)
명문 대학이 모여 있어 ‘일본의 라탱 지구(Quartier latin, 파리의 대학가)’라고도 불리는 진보초(神保町) 일대는 온통 출판사와 출판 도매점, 130년 역사를 가진 고서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런 지성의 거리 뒤쪽에 자리한 비스트로 알리고는 동네 주당들에게 사랑받는 다치노미야 중 하나입니다. 1950년대에 지어진 2층짜리 목조 고옥 외벽에 걸려 있는 이전 가게의 빛바랜 간판, 오래된 나무 문틀, 철 지난 구식 온도계 등 마치 반세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한 곳입니다. 예스러운 공간에서 와인과 프랑스 시골 요리를 파는 반전 매력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오픈 주방부터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얼음 가게였던 시절 얼음을 두고 장사하던 공간인 1층이 지금의 다치노미야가 되었고, 노부부가 주거용으로 사용하던 2층은 현재 다다미방에 앉아서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투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프랑스 시골 요리를 먹음직스럽게 담아서 내줍니다. 모두 산지 직송된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는데요. 최고 인기 메뉴는 오베르뉴(Auvergne) 지방의 향토 요리 알리고(アリゴ, Aligot, 치즈와 감자 퓌레를 섞은 요리)와 랑그도크(Languedoc) 지방 스타일의 스튜 카술레(カスレ, Cassoulet)입니다. 특히 이 카술레에 들어간 큼지막한 소시지 맛이 일품입니다. 이 외에 남성 애주가들에게 인기인 주먹만 한 크기의 햄버그(煮込みハンバーグ)도 아주 맛있고, 연어 아보카도 타르타르(サーモンアボカドタルタル), 돼지 곱창으로 만든 크로켓(豚ホルモンのコロッケ)도 인기 메뉴. 간판조차 없지만, 이미 다녀간 애주가들의 입소문만으로 승승장구 중인 지역밀착형 다치노미야입니다.
이정선 작가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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