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영국 군주제,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적 일체감 느낄 기제 곳곳
우린 원심력만 작동하는 것 아닌가
50펜스 동전 100개, 그러니까 50파운드(8만3000원)도 얼마 전 찰스 3세의 대관식에서 쓰임새가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보검 값'으로다.
찰스 3세 이상으로 주목받았다는 영국 보수당 정치인 페니 모돈트와 관련돼 있다. 추밀원 의장인 그는 대관식 내내 121㎝에 3.6㎏에 달하는 보검을 들고 흔들림 없이 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가 든 검은 두 종류였다. 처음에 든 게 3.6㎏ 보검(Sword of State)이었다. 그러다 덜 무거운 보검(Jewelled Sword of Offering)으로 바꿔 들었다. 이게 찰스 3세에게 건네진 검이다. 국왕이 잠시 찼다가 사제에게 넘겼고, 사제가 그걸 제단에 올려놓았다. 이때 동전 100개가 등장했다. 모돈트가 보검을 '되사기' 위해 내민 것이다. 찰스 3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떠날 때 그의 앞에서 걷던 모돈트가 든 검도 바로 이거였다.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거다. 영국은 이렇게까지 한다. 아마 오래전 속전(贖錢)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하기야 이번 대관식을 통해 영국에서 오래됐다고 하면 어느 정도 오래된 걸 말하는지 다들 느꼈을 것이다. 대관식이 열린 장소부터 유구했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선 고려 문종 20년인 1066년부터 대관식이 열렸다. 대관식 의자도 700여 년 전부터 썼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건, 가림막 때문에 못 봤겠지만 국왕 머리에 성유를 바르는 의식일 것이다. 영국 대관식 기록이 973년 에드가 왕 때부터의 것이 남아 있는데, 그때도 했다니 말이다. 그땐 동물 뿔에 담아 부었다고 한다.
영국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이 영국 국교회를 두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결혼시키고 매장하면서도 그들의 감성을 짓밟거나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대신에 영국 국교회는 덜 염려하고 덜 캐묻는 역할을 맡았다. 말과 음악으로 구성된 엄숙한 행사를 향해 나아갔고, 때때로 농촌을 종소리로 채웠다.”(『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영국의 군주제도 비슷한 면이 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고 신민들과 만나되 유세를 떨지 않는다. 위로와 격려할 뿐이다.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일을 하는데도 불평하지 않는다. 때때로 대단한 의식과 행렬도 제공한다.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건 변화하지 않지만, 변화할 건 변화한 채로다. 그러는 사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한다. 과거를 살아왔듯 현재를 살아내고, 또 미래도 맞을 수 있을 듯 상상하게 한다. 주기성(週期性)과 예측 가능성에서 오는 안정감과 영속감이다.
사실 최근 영국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유럽연합(EU)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 여파로 연합왕국은 삐거덕대고 몇 달 사이 두 명의 총리가 실각하는 일도 있었다. 경제난도 심각하다. 그런데도 사회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한 정치학자는 “영국 군주정도 한 요인”이라고 했다. 대관식에서 그 요체가 드러났다. BBC의 진행자 커스티 영은 이렇게 정리했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의 신비로운 의식, 아름다운 음악, 값비싼 보석들과 장엄한 마차는 눈부실 정도다. 세상이 어찌 바뀌든 전통과 제의·의식이 우리를 한데 묶는 데 필수적인 거라는 걸 보여줬다. 왕은 오래된 왕관을 쓰고 서약했지만, 대단히 현대적인 신도들이 함께했다. 환경운동가·자원봉사자·참전용사, 그리고 몇몇 수퍼스타까지…. 많은 영국적 요소들이 오늘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
이미 말했듯, 영국도 그 자체로 문제가 많다. 하지만 때때로 ‘함께한다’는 순간이 있긴 하다. 우리에겐 그럴 만한 기제가 있는가. 안타깝게 원심력만 작용하는 건 아닌가. 대관식을 보며 든 의문이다.
그나저나 75년 전 이집트의 왕 파룩은 “온통 혁명이다. 곧 다섯 명의 왕만 남을 것”이라고 했다. 넷은 스페이드·클로버·하트·다이아몬드 킹, 바로 트럼프의 킹이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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