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의 시선] ‘깡통전세’에 무너진 서민 주거안정

주정완 2023. 5. 12. 00:5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정완 논설위원

전세 시장의 혼란이 깊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전세 사기로 피해를 봤다는 신고가 속출한다. ‘피 같은 전세금’을 떼일 처지에 놓인 이들의 아우성이 커진다. 이들에겐 사실상 전 재산이 걸린 일생일대의 위기다. 최악의 경우 한 푼도 못 건지고 길거리에 나앉을지 모른다. 뾰족한 해법도 보이지 않는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일부터 법적 절차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이른바 ‘깡통전세’로 곤경에 처한 세입자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개별적인 사정은 훨씬 복잡하지만 일단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전국 22만 가구 역전세난 경고등
전세 사기 정부 대책은 반쪽짜리
사기 피해 아닌 세입자도 챙겨야

첫째는 악질 사기꾼에게 걸린 경우다. 이런 사기꾼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세입자를 속였다. 부동산 중개업소까지 사기에 가담했다면 세입자로선 더욱 알아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집에선 이미 소유권이 ‘바지사장’에게 넘어가고 주범은 자취를 감췄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집주인의 과욕으로 인한 투자 실패다. 빌라나 오피스텔은 집값과 전셋값의 차이가 크지 않다. 일부 지역에선 자기 돈 한 푼 없이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무자본 갭투자’가 성행했다. 한꺼번에 수십, 수백 채나 사들인 사람도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선 전세 사기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집주인이 처음부터 전세금을 떼먹을 작정을 했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아서다. 만일 집주인이 기대한 대로 집값이 올랐다면 ‘대박’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집값이 급락하면서 ‘쪽박’을 차게 됐다. 세입자로선 집주인을 잘못 만난 바람에 덤터기를 쓰게 생겼다.

셋째는 일반적인 역전세난이다. 대개 집주인은 전세 계약이 끝날 때쯤 새로운 세입자를 구한다. 계약 기간 전셋값이 올랐다면 전세금 반환은 순조롭다.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에게 돈을 받아 기존 세입자에게 내주면 된다. 반면 전셋값이 떨어졌다면 복잡한 일이 생긴다. 법적으로 전세금을 돌려줄 의무가 집주인에게 있지만, 현실에선 법대로만 되지 않는다. 이런 유형까지 전세 사기라고 할 순 없다. 사적인 채권자(세입자)와 채무자(집주인)의 관계로 봐야 한다.

문제의 원인이 다르면 해법도 달라야 한다. 비유하면 이런 식이다. 환자가 겉으로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의사가 같은 약을 처방하면 안 된다. 환자가 어떤 질환을 앓고 있는지 정확한 진단을 통해 맞춤형 처방을 해야 한다. 그게 진짜 실력 있는 의사다. 깡통전세 대책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 방안’을 발표했다. 한편으론 반갑고 다른 한편으론 아쉽다.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일정한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긍정적이다. 깡통전세의 세 가지 유형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정부가 제시한 전세 사기 요건에 대해선 너무 까다롭다는 반론이 있긴 하다. 어쨌든 전세 사기라는 범죄 피해와 사적인 채권·채무 관계를 구분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깡통전세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이들 중에도 답답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는 세입자가 적지 않다. 범죄자를 때려잡는 수사기관은 몰라도 서민 주거정책을 담당하는 국토교통부라면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했다.

집값과 전셋값이 하락하는 시기에는 역전세난 심화를 피할 수 없다. 국토연구원은 지난 2월 ‘전세 레버리지(갭투자) 리스크 추정과 정책대응 방안 연구’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집값이 15% 하락한다면 전국 22만2000가구에서 전세금 반환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추산했다.

이 중 21만2000가구는 집주인이 어떻게 해서든 전세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집주인이 집도 팔고 대출도 받으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온다는 가정에서다. 이렇게까지 하는 집주인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나머지 1만 가구는 집주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전세금을 돌려주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사기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세입자를 똑같이 취급하자는 건 아니다. 서민 주거안정 차원에서 접근해 달라는 얘기다. 역전세난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 최악은 내년 4월 총선을 코앞에 두고 정치권이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내는 것이다.

다만 야당이 주장하는 공공매입은 다른 사기 피해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찬성하기 어렵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도 “피해자들은 다 평등한데 국가가 누구한테만 사기 피해금을 대신 내주겠나”라며 선을 그었다. 야당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보이스피싱이나 주가조작 피해자도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 줘야 할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누군가를 지원할 때는 각별히 신중을 기하는 게 마땅하다.

주정완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