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원형극장 닮은 부채꼴 공간, 통합과 소통 일구다
이탈리아 시에나시 캄포광장
■
「 가운데 갈수록 낮아지며 하나로
양보와 타협의 의회주의 보는 듯
9개로 나뉜 구역은 평의회 상징
일상속에 녹아든 민주주의 원리
중국사상가 장자가 제시한 ‘대붕’
하늘에서 내려보면 ‘차이’ 사라져
」
멈춤이 없는 광화문·서울광장
광화문광장은 멈춤의 여유를 즐기기에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도시가 생성될 때부터 광장이 계획된 게 아니라 도시가 형성된 뒤 기존의 길을 반으로 쪼개 만들었기에 찻길과 병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광장 외곽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 있어 아늑해야 할 광장의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 점에선 인근 서울광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서울광장은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둬 그나마 광장다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렇더라도 삼각형 모양을 한 도로들로 갇혀 있어 어수선하기는 매한가지다.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이 특별히 기억되는 건 특별했던 순간 특별한 열기를 내뿜어서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낸 붉은 악마의 응원과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을 촉발했던 시위 때 서울광장은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찼다. 광화문광장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규탄할 때 촛불로 출렁거렸다. 물론 이런 경우를 위해서 광장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예외적이어야지 일상적이어선 곤란하다. 그래서 광장은 거창한 구호보다 시민들의 소박한 담론으로 지배되는 게 바람직하다.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 싫어져
이탈리아 도시에선 시민들의 일상에 잘 녹아든 광장을 쉽게 발견한다. 그중에서도 중세풍 도시 시에나의 캄포 광장이 대표적이다. 시 중앙에 자리 잡은 캄포광장에 들어서면 누구나 광장이 지닌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럴 정도로 캄포광장은 미적으로 빼어나다. 게다가 머물수록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서 광장을 떠나기가 싫어진다. 그래서 캄포광장은 느긋한 쉼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한다. 국군의 날 군사행진 외에는 딱히 용도를 찾지 못했던 과거 여의도광장의 삭막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캄포광장에선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들까. 푸블리코 궁전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장이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어서다. 또 부채꼴 끝자락으로 갈수록 서서히 높아져 광장이 경사진 모습을 하는데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이 여기를 성처럼 빙 둘러싸서다. 그리고 광장 끝자락에는 세 개의 출입구가 있어 여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입장한다. 원형극장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광장에 입장하면 누구든지 관객이 돼 착석하려고 한다. 실제로 광장에는 서 있는 사람보다 앉은 사람이 더 많다. 게 중에는 드러눕기까지 한다.
캄포광장은 소통 공간으로도 뛰어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광장에 앞뒤로 길게 그어진 선 때문이다. 광장 전체는 붉은색 벽돌인데 여기에 흰색 벽돌을 선으로 나란히 심어서 광장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로로 나뉜다. 그리고 벽돌로 된 선이 8개여서 광장은 총 9개 영역으로 구분된다. 광장이 9개 영역으로 구분된 건 시의 통치기구인 평의회(council)가 9인으로 이루어져서다. 시에나 시는 과거 17개 콘트라데(Contrade, 교구)로 구성되었는데 이 콘트라데들이 9명의 평의원으로 대표되었다. 그래서 캄포광장은 대의제를 전제로 설계된 광장으로 보인다.
대의제 뒷받침하는 소프트웨어
대의제를 전제로 설계된 광장이라도 이를 뒷받침할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대의제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의견을 수렴할 소프트웨어가 필요한데 그건 구성원 간의 양보와 타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캄포광장의 색다른 모습은 이런 소프트웨어를 은연중에 제공한다. 광장 뒤쪽에선 선들 사이의 간격이 넓어도 앞쪽으로 올수록 좁아져 맨 앞 중앙에선 한 공간에 모두 모인다. 이런 모양은 의견 간 차이가 커도 결국 하나의 의견으로 수렴된다는 걸 말해주는데 이는 양보와 타협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의장석을 중심으로 부채꼴처럼 퍼진 오늘날의 의사당 전형을 본다.
중국사상가 장자도 이런 소통의 소프트웨어를 일찌감치 제시한 바 있다. 단 캄포광장 방식과는 차이가 있는데 캄포 광장이 ‘지상의 광장’을 통해 보여준다면 장자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보여준다. 장자가 자신의 책을 대붕(大鵬)의 비상으로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장자는 소통에 이르려면 대붕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가능한 멀리에서 밑을 내려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아주 먼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땅 위의 모든 것들에 차이가 사라져 하나로 보여서다. 『장자』 원문을 직접 인용해보자.
땅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흙먼지도 날아다닌다.
이것들은 생물들이 서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생겨난다.
그런데 땅에서와 달리 하늘이 푸른 건 본래의 빛깔일까?
아니면 너무 멀어서 끝이 없어서일까?
붕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늘을 올려다볼 때처럼 땅도 똑같이 푸르다. (‘소요유’)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의 차이
뱁새처럼 낮게 날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리가 가까워 아지랑이와 흙먼지도 구분한다. 원숭이가 ‘조삼모사(3+4)’와 ‘조사모삼(4+3)’을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보면 ‘7’로 같다. 마찬가지로 캄포광장 뒤쪽에선 ‘3+4’와 ‘4+3’이 구분돼도 광장 앞쪽으로 올수록 ‘7’로 같아진다.
장자는 아지랑이(3+4)와 흙먼지(4+3)도 생물의 호흡으로 생겨난 똑같은 것(7)임을 안다. 이는 하늘 높이 날아오른 대붕처럼 아주 높은 데서 밑을 내려다봐서다. 이에 장자는 하늘이 온통 푸른 것도 원래 푸른색이어서가 아니라 땅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는다.
그런데 대붕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건 쉽지 않다. 마음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대붕도 마음을 비웠기에 하늘을 높이 날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장자는 불가가 요구하는 엄격한 비움이 아니라 유(遊), 노닒을 통한 비움을 말한다. 그래서 『장자』 첫 편 제목도 소요유(逍遙遊)이다. ‘逍’는 이리저리 거닐고, ‘遙’는 흔들흔들 거닐고, ‘遊’는 유유자적하며 노니는 건데 신기하게도 ‘책받침 변(辶)’이 모두 있다. 이는 쉬엄쉬엄 간다는 의미이므로 소요유란 단어에선 바쁘거나 조급한 흔적이 조금도 없다. 이것이 곧 노닒인데 멈춰서 쉬는 휴(休)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광장은 마음을 비우는 장소
사람들이 광장을 필요로 하는 건 ‘유’ 때문이지 ‘휴’ 때문이 아니다. 소통도 ‘휴’ 차원이면 소통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다. 반면 ‘유’ 차원이면 즐겁게 소통하는 일이다. 소통뿐만이 아니다. 일도 마찬가지여서 유의 차원이면 일을 즐긴다. 그렇다면 광장은 이런 유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장소가 돼야 한다. 의사당도 일종의 광장이므로 정치도 이렇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유를 포기해서인지 정치인은 불통을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다. 그래서 차이의 극대화를 도모해 ‘3+4’도 ‘3+2+2’와 ‘3+1+3’으로까지 구분해 우열을 비교하려 드니 맨날 싸움만 하게 된다.
캄포광장에선 이탈리아 최고의 축제인 팔리오가 매년 열린다. 이 축제는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데 구역별로 뽑힌 선수들이 안장 없이 말을 몰고서 광장을 세 바퀴 빨리 돌기 위해 경쟁한다. 이때 군중은 열광하면서 소속된 콘트라데와 관계없이 모두 하나가 되는데 그 시간은 90초이다. 그런데도 몸으로 유를 체험하고 마음으로 소통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이런 축제를 통해서 ‘분열의 광장’도 ‘통합의 광장’으로 바뀔 수 있다면 광화문광장에서도 이런 축제를 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것이 광화문광장이 하드웨어로서 지닌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라 본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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