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 칼럼니스트가 본 시계의 지금
최근 시계 업계의 가장 큰 이슈는 팬데믹이었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기존 시스템과 질서를 뒤흔든 전 세계적 역병은 시계 업계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특히 시계 전시회는 실질적으로 일원화됐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바젤월드(Baselworld)는 팬데믹 이전부터 불협화음으로 쇠퇴를 예고했으나, 팬데믹 이후 모든 전시가 중단되며 황급히 막을 내렸다. 바젤월드에 참가했던 유수의 브랜드는 또 다른 시계 전시회인 SIHH에서 간판을 바꿔 단 제네바의 ‘워치스 앤 원더스’로 이동했다. 팬데믹 시점에서 온라인과 피지컬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엔데믹을 기다린 결과, 2023년 워치스 앤 원더스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시회로 발돋움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변화도 있었다. 전통적 전시회, 즉 정해진 기간과 장소에서 일제히 쇼케이스를 열던 방식에서 벗어나 개별 브랜드가 주도하는 순회 전시나 온라인 발표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전통적 전시회의 힘은 아직도 강력하다. 이번 워치스 앤 원더스 2023에 집결한 브랜드의 신제품은 시계 업계의 흐름을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하나둘씩 내놓던 복각 시계는 이제 하나의 흥행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 발표했던 시계를 원형에 가깝게 다시 만들어내는 복각은 브랜드의 역사와 아카이브를 새로운 세대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IWC의 ‘인제니어 오토매틱 40’, 까르띠에의 ‘프리베 탱크 노말’, 롤렉스의 새로운 ‘GMT 마스터 II’ 같은 시계는 멀게는 1900년대 초반, 가깝게는 1970년대에서 되돌아와 당시의 디자인과 유행을 재발견하게끔 한다. 복각을 내놓는 시계 브랜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복각을 통해 원본인 빈티지 모델을 수집하게 됐다면 아마도 최상의 결과이지 싶다. 복각은 교육(?)적 목적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이미 히트한 시계를 내놓는 것만으로도 실패 확률이 극히 낮출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필자의 체감이겠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계 업계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진 듯하다. 때문에 실패 확률이 낮은 베리에이션 모델이 확대되는 추세다. 이미 내놓은 제품의 성공 확률이 높다고 판단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 제품을 내놓는다. 다이얼 컬러, 케이스 소재를 달리하는 접근은 고전에 속한다. 기존의 틀을 이용해 기능을 이식하거나 드레스 워치, 스포츠 워치의 경계를 교묘하게 허물어 융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쉐론 콘스탄틴의 ‘오버시즈 문페이즈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는 스포츠 워치의 폼을 따르지만 드레스 워치의 화법을 적용했다. 과거였다면 이런 결합에 대해 기존 문법을 위반하는 행위라는 반발이 있었을 테지만 대부분은 변화가 승리했다. 성공 확률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아주 정교하게 승률을 계산한 브랜드도 있다. 기계식 시계의 꽃, 복합 기능 시계인 컴플리케이션을 새롭게 내놓는 브랜드다. 트렌드를 논할 때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은 좋은 소재다. 복잡한 기능의 아름다움은 마치 꽃과 같아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그 수면 아래에는 화려함만큼이나 큰 실패 확률이 도사리고 있다. 긴 개발 기간과 비용을 회수하기 위한 높은 가격까지도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그럼에도 랑에 운트 죄네, 바쉐론 콘스탄틴, 로저 드뷔, 예거 르쿨트르는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날짜와 요일을 조정하는 푸시 버튼에 크로노그래프의 작동 기능을 통합한 랑에 운트 죄네의 ‘오디세우스 크로노그래프’, 남반구와 북반구에서 볼 수 있는 달의 형상을 모두 표시하는 더블 문페이즈 디스플레이에 미닛 리피터 · 투르비용 · 퍼페추얼 캘린더 등 총 11가지 기능을 망라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캐비노티에 듀얼 문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같은 시계는 극도로 정밀한 기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피워냈다. 여성용 시계는 꾸준하게 파이를 늘려가고 있다. 1990년대를 기준으로 남성용과 여성용의 비율은 9:1. 압도적으로 남성을 위한 시장이었다. 브랜드마다 목적은 다르겠지만, 이미 레드 오션이 된 남성 워치 시장에서 새로운 판로는 여성의 손목을 겨냥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취향에 맞춘 시계를 다양하게 내놓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주류는 주얼리에 속하는 주얼리 워치다. 시계라지만 실제 주인공은 주얼리이기 때문이다. 여성용 컴플리케이션으로 남성처럼 기능 확장을 꾀하는 가운데 샤넬과 에르메스, 루이 비통 같은 토털 브랜드가 시계에서도 특유의 색채와 위트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소재의 사용은 전에 비해 기세가 무뎌졌고, 오히려 컬러에 조금 더 관대해졌다. 블루와 그린이 장기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샐먼(Salmon) 컬러가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 과거에도 선보였던 컬러지만 블루나 그린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긴 하다. 큰 틀에서 본다면 시계 트렌드는 앞서 언급한 내용과 같이 최근 몇 년간 이어진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튀거나 도드라지는 데 몰두하기보다 대중의 관심도와 수요가 높은 쪽을 택하고 있다. 여기에 워치 하우스도 대중적 눈높이를 살피며 맞춰가려는 영민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사회에서 더 많은 이에게 다가가려는 시계 업계의 제스처는 여전히 시계가 우리에게 중요한 물건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노력이다.
구교철
워치 칼럼니스트이자 국내 최대 규모의 시계 커뮤니티 겸 출판사〈타임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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