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대결 뒤에 반도체가 있었다

김남중 2023. 5. 1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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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칩 워
크리스 밀러 지음, 노정태 옮김
부키, 656쪽, 2만8000원
1958년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엔지니어였던 잭 킬비는 다수의 전자 부품을 단일한 반도체성 물질 블록 위에 구성한 집적회로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오른쪽은 대만 반도체의 아버지 모리스 창.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일했던 창은 대만 정부의 초청으로 대만으로 건너와 1987년 TSMC를 설립했다. TSMC는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기업 중 하나다. 부키 제공


반도체는 그동안 주로 기술과 경제 측면에서 논의돼 왔으나 근래에는 지정학적 의미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칩 워(Chip War)’는 반도체를 21세기 세계 경제와 기술, 정치의 키워드로 바라본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저자 크리스 밀러는 반도체 기술과 산업의 발달사를 폭넓게 서술하면서 국제정치와 지정학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의미를 탐구한다.

책에 따르면, 오늘날 반도체는 핵이나 석유보다 더 중요하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반도체 수입에 석유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도 반도체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PC와 스마트폰, 데이터센터는 물론이고 머신 러닝, 미사일, 자율주행 자동차, 군사용 드론까지 모든 고급 기술은 최첨단의 칩, 즉 반도체나 집적회로를 필요로 한다. 아이폰 한 대가 작동하려면 12개가 넘는 반도체가 들어가야 한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들 때 1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사용될 수 있다.

반도체는 가장 널리 쓰이는 제품이고, 그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는 데 아무나 만들수 없다. 극히 소수의 회사들이 반도체의 설계와 생산을 장악하고 있다. “이토록 적은 수의 기업에 이렇게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경제 영역은 오직 반도체뿐이다.” 반도체 공급망은 모두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속해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반도체의 최대 소비 시장은 중국이다. 반도체가 얼마나 첨예한 문제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 한국, 네덜란드, 대만 등이 반도체 생산 공정의 중요 단계를 독점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반도체 산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덕분이다.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반도체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2017년 현재 집적회로는 한국의 수출 총액 중 15%, 싱가포르의 17%, 말레이시아의 19%, 필리핀의 21%, 대만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에서 타이완까지, 싱가포르에서 필리핀까지, 반도체 생산 설비를 지도 위에 놓고 보면 마치 아시아 전역에 배치된 미군 기지의 위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며 “전자 제품 공급망은 지난 50년간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떠받쳐 왔다”고 주장한다.


반도체의 역사는 1950년대 미국의 군사 기술에서 시작된다. 페어차일드에서 반도체를 만들어 미국과 방위산업체에 납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자 산업으로 그 활용처를 넓히면서 세상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해외 공급책으로 출발했다. 이어 정부 지원과 싼 가격을 무기로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천하의 인텔도 일본의 반도체 공세에 못 견디고 D램 분야를 포기할 정도였다. 미국은 일본의 대항마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는 한국 반도체 기업의 출현을 반기고 지원했다. 이것이 한국 반도체 신화의 시작이었다. 1998년에는 한국 기업이 일본을 제치고 D램의 최대 생산자 자리를 차지했다.

대만은 1987년 모리스 창이 TSMC를 세우면서 반도체 국가가 됐다. 대만 정부는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한 모리스 창에게 반도체 산업의 전권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만 반도체 산업을 원합니다. 말해 보시오.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실리콘밸리는 냉전 동맹국과 협업하면서 극히 효율적인 글로벌 분업 체계를 이뤄냈다. 설계는 미국, 생산은 대만과 한국, 장비는 유럽과 일본이 담당하는 식이다. 하지만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반도체 공급망의 지정학적 취약성이 드러났다.

“최첨단 프로세서를 제조할 수 있는 회사는 단 둘, TSMC와 삼성뿐이다. 여기서 미국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이제 첨단 프로세서 생산은 모두 대만과 한국에서 이루어지며 전 세계의 반도체 수요가 두 나라에 달려 있는데, 이 두 나라는 최근 급부상한 미국의 전략적 경쟁자와 지척에 있다. 바로 좁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중국의 고민도 크다. “중국은 알고 있다. 모든 현대 전자 기기가 의존하고 있는 반도체는 외국인이 만들고 있고, 중국의 목숨이 반도체에 달려 있다는 것을.”

중국의 반도체 독립은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냉전시기 소련은 자국 반도체 제조 업체를 되살려 보려고 대대적인 지원에 첩보 작전까지 동원했으나 실패했다. 정치적 간섭과 국제적 공급망 부재 등이 원인이었다. 중국이 미국을 벗어난 독자적인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을까. 저자는 “반도체에는 세계에서 가장 치밀하고 촘촘한 공급망과 무역 이동이 걸려 있다”며 중국의 반도체 독립 구상을 “세계화의 종말을 약속하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중국과 대만의 갈등은 반도체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저자는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한다면 장비 제조 업체들은 반도체가 부족해서 반도체 제조용 장비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면서 그 피해는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왔던 경제적 재앙보다 더 클 것이라고 전망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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