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 잡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박광홍 기자]
출범 1주년을 넘긴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대미대일 밀착'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바라던 이른바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에 응하고자 하는 윤석열 정부의 의지는 분명했다. 물론 이것은, 그동안 냉각상태였던 한일관계 개선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여러 현안에서 일본 측에 '양보'하며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외교안보 정책은 국내 여론 일각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비난하는 논리의 핵심적인 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당에서 "일본의 전쟁범죄에 면죄부", "희대의 굴종 외교"와 같은 비난들이 제기되는 사이, 여당에서는 이를 "반일선동"으로 거칠게 일축하면서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은 실종되었다.
민족적 단위의 감정기억과 직결된 과거사 문제를 다룸에 있어 국민적 합의를 수렴하고 반대의견을 설득하는 절차가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갈등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상호이해로 채워졌어야 할 빈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분노의 감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정부 단위의 독단적인 정책결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 단위의 화해와 연대이다. 국가의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이상, 시민사회 단위로 손을 맞잡고 어루만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다음의 일은 더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에. 그러나 한국 사회의 대일인식은, 그리고 일본사회의 대한인식은 어떠한가. 위정자들의 정책결정에 환호하거나 노여워하기에 앞서, 우리는 각자의 세계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현상을 이해하려 한 적이 있을까.
▲ 구걸하는 상이군인(1951년) 두 다리를 잃은 일본의 상이군인이 도쿄의 아사쿠사 일대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15년 간의 전쟁체험으로 패전 후 일본에는 염전/반전 기류가 높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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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패전으로 귀결된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일본 국민 3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한국 대중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오해와 달리,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정의로운 '성전'으로 평가하는 해석은 결코 일본 사회의 주류적인 역사관이 아니다. 소수 극단세력들이 5.18을 왜곡한다고 해서 그것을 한국 대중의 일반적인 역사관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히려, 천황 숭배를 축으로 하는 폭력적인 사상탄압, 비합리적인 정신론과 인명경시 풍조야 말로 패전 이전의 세계에 대한 일본 국내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 일미신안보조약에 반대하여 국회 앞에 모인 시위대(1960년) 기시 내각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다수당의 힘으로 가결시켰다가 민중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시위대의 위세에 놀라 방일을 취소했고 기시 내각은 7월 총사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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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체험을 기초로 한 염전/반전사상은 현실정치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을 극동지역의 보조전력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미국의 압력은 일본 민중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한때 '일본군 재창군'까지 검토했던 미국과 일본의 위정자들을 향한 일본의 민중의 대답은 일미군사동맹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이었다(관련기사: '평화 헌법'의 일본은 어떻게 군사대국이 되었나). 전쟁반대와 평화헌법 수호를 외치는 일본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징병제 반대론,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결부되어 더욱 강력한 시너지를 내었다.
물론 전쟁체험에 대한 기억이 한결같이 염전/반전사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죽어간 전우들의 희생, 자신들의 고난이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일부 참전자들은 <들어라, 와다츠미의 목소리>로 대표되는 염전/반전 기류를 '전쟁체험의 정치적 이용'으로 보고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들은 전몰자들의 죽음을 '무의미한 개죽음'으로 평가절하하기 보다 '숭고한 순국'으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 <아아, 결전항공대>의 포스터 가미카제 특공대의 창시자 오니시 다키지로 제독을 주제로 하는 1974년작 영화. 나라를 위해 출격하는 특공대원, 철저항전을 주장하는 오니시 및 강경파 장교들의 목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놓고는 이제와서 스스로의 보신에만 급급한' 국가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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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와 같은 내부적인 성찰이 곧바로 타자이해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가령, 후쿠마 요시아키는 <아아, 결전항공대>에서 가미카제특공대의 창시자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郎)제독이 특공으로 죽어간 청년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한 천황과 국가를 비판하며, 끝내는 자살하기까지에 이른 과정이 묘사된 것의 의의를 평가하면서도, 해당 영화에 오니시 제독이 지휘했던 '충칭 공습'이나 필리핀 민중의 고난 등이 언급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즉, 특공대 문제, 개전과 항복에 이르는 국내적 책임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정작 일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외국민중의 존재는 생략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상기한 무라야마 담화가 1995년에 발표되었음을 감안하면, 전쟁책임에 대한 사회적 반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외국민중의 피해가 논의의 장으로 떠오른 것은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대중에게 있어 전쟁당사국은 미국과 영국 등 서구열강에 한정되는 경향이 강했다. 1945년 12월 말레이 침공과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고 '대동아전쟁'이 선포되기 이전, 중일전쟁은 '전쟁'이 아닌 '사변'으로 불렸다. 일본 정부는 '중화민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중국은 일본에게 전쟁당사국 취급도 받지 못한 셈이다. 전쟁당사국 문제에서조차 이러했으니,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 점령지였던 동남아시아 각국의 현안들은 더더욱 둔감했다. 조선인 강제동원은, 전시 일본본토에서 이루어진 동원과 마찬가지로 같은 총력전 체제 내의 동원으로 이해되었다. 조선은 제국의 울타리 안에 있었고,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인이었으므로, 조선인 동원은 일본인 동원의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 다큐멘터리 영화 타리나이(タリナイ)의 한장면(2018) 태평양전쟁 당시 2만 여 일본군이 마셜 제도에서 사망했는데 그중 다수는 아사였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기 위해 마셜 제도를 방문한 사토 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에서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 남편이었던 이들을 헛되이 희생시킨 국가의 책임과 더불어, 마셜 제도 주민들에 대한 일본군의 폭력 문제까지 다며 전쟁책임 문제를 다방면으로 확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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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패배하는 차원의 문제로 접근하는 한 과거사 문제의 해결은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시민 사회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에 묶여있을 것이 아니라, 반성이 국경 밖으로 확장될 수 있게 끊임없이 대화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무책임한 국가지도부에게 동원되어 허망하게 죽어간 일본의 어린 청년들의 고뇌와 슬픔에 공감할 수 있다면, 그 무책임한 국가지도부가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한 폭력에 대해서도 보다 더 쉽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옛 제국의 체제를 성토하고 반성하는 것과 현대 일본인들에 대한 공격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면, 화해라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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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日本戦没学生手記編集委員会, 1947, 『きけ わだつみのこえ』東大協同組合出版部. 福田良明, 2007, 『殉国と反逆――「特攻」の語りの戦後史』青弓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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