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자투리 야채와 새우가 남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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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희 기자]
▲ 카레를 끓이는 오후 카레만큼 변주가 다양한 요리가 또 있을까. |
ⓒ unsplash |
"카레나 해 먹을까?"
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파부터 볶아 향을 낸다. 다음으로 당근, 애호박, 파프리카, 새우 순으로 넣고 살짝 익을 정도로만 볶아준다. 적정량의 물을 붓고 카레가루를 섞은 뒤 재료가 골고루 익도록 휘휘 저으며 끓인다.
주방을 채운 냄새는 유년의 시절로 날 데려간다. 5~6세 무렵이었나. 가끔 오래된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재생되는 기억이 있다. 친구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그만 저녁 시간이 되어버렸다.
80년대 초반, 그 시절엔 동네 아이 밥 먹이는 게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어서 수저 한 벌과 밥공기 한 개가 추가된 저녁상에 친구 가족과 함께 둘러앉았다. 밥상 위에는 노란색의 이질적인 액체가 짙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거 먹어봤니?"
망설이는 내 기색을 눈치채셨는지 친구 어머니가 물어보셨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내게 "먹어봐, 맛있어"라며 다정하게 권하셨다. 친구네 가족에게는 이미 익숙한 음식인지 다들 그 이상한 냄새가 나는 양념을 한 국자 가득 떠서 밥에 비벼 먹기 시작했다.
▲ 카레 유년 시절로 떠나는 여행 |
ⓒ pexels |
그것이 카레에 대한 내 첫 기억이었다. 어지간히 신기한 맛이었던지 집에 오자마자 엄마에게 말했다. 오늘 처음 먹어본 샛노랗고 걸쭉한 액체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다음날 밥상에는 바로 카레가 올랐다. 그것도 큰 냄비 가득 넉넉하게. 두세 끼를 먹고도 남을 만큼의 양이었다.
그 후로 우리 집 단골메뉴는 카레가 되었다. 당시 엄마는 음식을 많이 가리던 나와 동생들에게 최적의 요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몸에 좋은 온갖 야채와 고기를 집어넣어 끓이셨고 우리는 강한 양념 맛에 가려진 재료들을 별 거부감 없이 씹어 삼켰다. 엄마의 요리법은 갈수록 진화해서 나중에는 우유를 넣어 크림수프처럼 부드럽게 끓이기도 하셨다.
손이 큰 엄마는 늘 음식을 넉넉하게 하셨고 특히 맛있다고 말한 음식은 며칠을 두고 먹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놓으시곤 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뿌듯한 부모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양껏 먹고 물려버린 나는 카레를 찾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 리스트에서 사라졌던 카레는 결혼과 함께 다시 밥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남편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그이지만 특히나 카레는 더 좋아한다. 그러니 내가 먹기 싫다고 안 만들 수도 없어서 다시 식탁에 올리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에 이만큼 변주가 다양한 식재료가 또 있을까. 각종 야채와 돼지고기를 넣고 뭉근하게 끓이기도 하고, 오늘처럼 고기 대신 새우로 해물카레를 만들기도 한다. 색색깔의 야채를 가득 넣고 끓인 후 마지막에 우유를 살짝 첨가해도 맛있다.
아니면 카레가루만으로 심플하게 끓여낸 후 볶은 야채나 소시지, 계란프라이를 토핑으로 올리는 방법도 있다. 렌틸콩을 넣거나 토마토를 섞어 조금 색다르게 즐길 수도 있다. 요즘 다채로운 레시피로 조리를 하면서 다시 카레의 맛에 눈뜨고 있다.
띠링! 휴대폰 메시지 알림이 들린다. 남편이 오늘은 일찍 퇴근할 모양이다. 냄비 안을 뒤적이니 큼직하게 썰어 넣은 야채들이 먹기 좋게 익어가고 있다. 그가 오면 식탁에 마주 앉아 갓 지은 뜨끈한 밥에 맛있게 비벼 먹어야지.
카레를 먹을 때면 코와 입이 알싸해지며 정체불명의 노란색 액체를 처음 대면하던 날로 돌아간다. 식탁에서 떠날 유년 시절로의 여행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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