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만의 승리: E. 진 캐롤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이겼다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 온 인생이 아니란 걸 전 세계가 알고 있었지만, 출마 선언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그를 둘러싼 갖은 폭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히 이 기간에만 무려 8명의 여성이 트럼프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되레 자신이 '피해자(Victim)'라며 피해 여성들을 고소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결국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어떤 여성들에게는 절망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인권을 짓밟은 인물이 세계 최고 권력을 손에 넣은 셈이니까요. 그래서인지 트럼프에게 성적 피해를 입었다는 폭로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2019년 6월, 엘리자베스 진 캐롤(캐롤)이 뉴욕 지를 통해 1990년대 중반 트럼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무려 26년 동안 〈엘르〉 US에서 조언 칼럼을 쓴 칼럼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이고 작가입니다. 캐롤의 칼럼 'Ask E. Jean(캐롤에게 물어봐)'는 미국 출판계에서 가장 오래 연재된 조언 칼럼 중 하나죠.
캐롤은 1995년 말 혹은 1996년 초 뉴욕시의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에서 우연히 트럼프를 만났고, '여성용 선물을 추천해 달라'는 제안에 응했습니다. 트럼프는 란제리 매장에서 보디슈트를 고른 다음 캐롤에게 시착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수락한 캐롤이 탈의실로 들어가자, 트럼프가 뒤따라 들어와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당시 캐롤은 대응을 포기했습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백악관은 이를 즉각 부인했습니다. 캐롤을 만난 적도 없고, 그가 책을 팔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거짓 폭로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심지어 트럼프는 "그(캐롤)는 내 타입이 아니다"라고도 말했죠. 이에 캐롤은 트럼프와 자신이 함께 찍힌 1987년의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여전히 트럼프는 캐롤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캐롤은 2019년 11월, 뉴욕 대법원에 트럼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성폭행 혐의에 대한 형사재판이 아니고 민사재판인데요. 관련 공소시효 때문이었습니다.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는 줄곧 자신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그러던 중 캐롤은 2022년 뉴욕주의 한시적 특별법인 성인 생존자법(Adult Survivors Act)에 의거, 성폭행과 관련한 민사 소송을 추가로 제기했어요. 이 새로운 법은 위법 행위가 언제 발생했는지에 관계 없이 성적 피해를 주장할 수 있게 합니다.
재판이 시작된 건 지난달 말입니다. 뉴욕 남부연방지방법원 판사는 익명의 남성 6명과 여성 3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을 선택했습니다. 캐롤은 직접 재판정에 나타났고, 트럼프는 동영상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재판에는 캐롤처럼 수십 년 전 트럼프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도 증인으로 섰습니다. 트럼프의 변호인은 "사건 당시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느냐"라고 했고, 캐롤은 "사람들은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늘 '왜 그때 비명을 지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은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라고 답했습니다.
또 트럼프의 변호인은 "책을 더 많이 팔려고 지금 폭로를 한 것이 아니냐"라고 했고, 캐럴은 '미투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2017년,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전적을 두고 수많은 영화계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침묵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여성들의 궐기로 만연한 성폭력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캐롤은 이 재판에서 끝내 역사를 썼습니다. 배심원단 9명은 트럼프가 캐롤에게 500만 달러(약 66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평결했습니다. 트럼프의 성폭행은 증거 부족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그가 캐롤을 성추행하고 폭행했으며 명예를 훼손한 것은 사실이라고 봤습니다. 가디언은 이를 '미국 전직 대통령을 성범죄자로 규정한 최초의 판결'이라고 평했습니다.
이후 트럼프는 즉시 SNS에 "난 여전히 그(캐롤)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 이번 평결은 역사상 최악의 마녀사냥"이라고 항변했습니다. 트럼프 측은 항소를 할 생각입니다. 반면 27년 만에 삶을 되찾은 캐롤은 "오늘 세계는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성명을 내놨습니다. 그는 이 승리를 "나만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피해를 믿어주지 않아 고통을 겪은 모든 여성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을 할리우드에서 몰아낸 여성들로부터 용기를 얻은 캐롤이, 또 다른 여성들에게 그 용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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