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우면 쓰러져… 냉장고도 열 수 없는 '한랭응집소병'
한랭응집소병은 말 그대로 추울 때 문제를 일으키는 한랭응집소 항체 때문에 생기는 병으로, 비교적 최근 존재가 알려진 희귀질환이다. 이름도 낯선 질환이지만 우리나라에도 한랭응집소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한다. 자신이 한랭응집소병인지 모른 채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빈혈과 피로에 고통받고 있다면, 한랭응집소병을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여름 에어컨·냉장고도 피해야 하는 한랭응집소병
한랭응집소병(CAD)은 적혈구 파괴가 지속·반복되는 극희귀 자가면역 혈액 질환이다. 정상 체온(약 37도) 이하가 되면 적혈구가 비이상적으로 파괴되는 용혈현상이 발생해 극심한 빈혈, 피로, 호흡곤란, 청색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인구 100만 명당 약 1명에게 발생한다고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엔 약 100명 내외의 환자가 존재한다고 추정된다. 너무 희귀하다보니 병명코드도 없어 정확한 환자 규모도 파악되지 않는다.
체온보다 낮은 환경에서 증상이 나타나는 병이다보니 겨울만 조심하거나 추운 나라만 가지 않으면 되는 병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기온 자체가 낮은 겨울에 증상이 더 악화하긴 하나 여름도 예외는 아니다. 한랭응집소병 환자에겐 무더운 날 당연하게 에어컨을 틀어둔 실내에 들어가는 일이 불가능하다. 시원한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여는 일도 허락되지 않는다.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한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 덧신을 신어야 한다. 털장갑을 껴야만 냉장고를 열 수 있고, 빨래, 요리도 가능하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체온 유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랭응집소병의 증상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주요 증상이 빈혈, 피로감이다보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한랭응집소병의 빈혈이나 피로감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다. 이들이 느끼는 피로나 증상은 항암치료 중인 암환자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랭응집소병 환자의 피로감 점수(FACIT-Fatigue score)는 32.5점으로 진행성 암 환자의 피로감 점수(28~39점)와 비슷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랭응집소 질환자는 대부분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다. 취직을 하더라도 항상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예측할 수 없는 응급상황이 수시로 발생해 불가피하게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한랭응집소병은 증상이 반복될 때마다 혈전 위험이 증가해 사망위험이 커져 위험한 질환이기도 하다. 한랭응집소병 환자의 혈전 발병률은 1000명당 30.4명으로, 비 한랭응집소병 인구의 1000명 당 18.6명보다 약 2배 높다. 혈전 색전증은 1년 사망률이 20%에 달하는 치명적인 질환이다. 그러다보니 암과 같은 악성질환이 아님에도 한랭응집소병 환자들은 진단 5년 이내에 환자 10명 중 4명(39%)이 사망한다.
증상만큼이나 치료도 난감한 게 한랭응집소병이다. 치료법이 없진 않지만, 증상을 잠시 개선하는 수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한랭응집소병 치료에 수혈, 혈장교환술, '리툭시맙'이라는 항암제를 사용하는데, 모두 대증치료제다보니 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한랭응집소병 환자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혈전도 일반적인 혈전용해제로는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일반적인 혈전은 혈전용해제만 꾸준히 복용하면 큰 문제가 없으나, 한랭응집소병으로 인한 혈전은 일반적인 혈전과 원인이 달라, 혈전용해제가 소용이 없다.
한랭응집소병은 증상이 불규칙하게 갑자기 나타나 예측이 불가능하고, 증상이 개선되기까지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 수혈이나 혈장교환술을 받고 나서 바로 증상이 개선되는 환자도 있지만, 환자에 따라 며칠씩 입원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장 교수는 "증상 관리를 위한 규칙적인 치료는 불가능하고, 그나마 시행하는 치료법도 큰 효과가 없다"며, "환자들은 추위를 피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질병관리법도 없어 고통이 크다"고 말했다.
의료 현장에선 엔제이모의 도입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약이 워낙 비싸다보니 국내 도입은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 기준 엔제이모의 가격은 바이알 당 약 1800달러(약 239만원)다.
장준호 교수는 "현재 한랭응집소 치료제로 정식 허가를 받은 약물의 경우, 치료 효과는 즉각적이고 근본 원인을 조절해주니 80% 이상의 환자가 투약 즉시 피로감 등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를 체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워낙 고가의 약이다보니 국내에서 실제 환자가 사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보험급여 적용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해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치료법 발전하고 있어… '진단이 반' 의심될 땐 병원으로
한랭응집소병은 아직 우리나라에선 치료가 마땅치않지만, 그럼에도 일단 진단이라도 받으면 희망이 있는 질환이다. 치료 효과가 오래가진 않더라도 병명을 알면 위급 상황을 막을 수 있고, 조금씩 발전해가는 치료법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한랭응집소병이 의심된다면, 적극적으로 전문 진료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장준호 교수는 "한랭응집소병은 진단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질환을 의심하기 어려워 진단까지 오래 걸리는 경향이 있다"며, "미발굴 환자가 많진 않을 것이나 너무 희귀한 질환이다보니 환자도 의사도 의심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자신이 환자라는 걸 알지 못해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힘겨운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한랭응집소병 환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피로와 빈혈을 겪고 있다면 큰 병원을 찾아 혈액종양내과 등에서 정확한 진료를 받아보길 권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치료법 중 아주 효과적인 건 없으나 그래도 뭐라도 하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고 전했다. 장준호 교수는 "당장은 수혈밖엔 마땅한 방법이 없다 해도 어떤 식으로라도 해결이 필요한 질환이니,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한랭응집소 진단을 받은 중년 환자의 경우, 수십년 간 여러 진료과를 전전했음에도 원인을 찾지 못해 정신질환까지 의심을 받았으나, 한랭응집소 질환으로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자 증상이 개선돼 한결 나은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장준호 교수는 "한랭응집소병은 극 희귀질환이라 질환이나 치료 정보를 얻기 어렵고, 환자의 수가 너무 적어 환자단체도 만들 수 없다보니 소외된 이들이 많다"며, "다행히 신약이 조금씩 나오고 있고,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매우 많으니 환자들이 희망을 갖고 기다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장 교수는 "현재 한랭응집소병은 질병코드조차 없어 앞으로 급여를 진행할 때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을 것으로 예상하는데, 국회와 정부 등에서 질병코드도 없는 극 희귀질환자를 위한 대안도 마련해주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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