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메, 몇 초만에 멈추게 했다…일본이 찾은 '왕따 비방책'
이지메 막기 위한 ‘제3 방안’ 확산
학교폭력(학폭)에 관한 한 ‘원조 국가’는 일본이다. 1980년대부터 ‘이지메(いじめ·집단 따돌림)’라는 용어가 등장했을 정도로 교내 괴롭힘이 일찌감치 사회 문제가 됐다. 이런 일본에서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에 이어 ‘방관자 교육’이라는 제3의 방안이 확산하고 있다.
학교폭력 현장엔 피해자와 가해자만 있는 게 아니다. 당사자 외 다수인 방관자가 있다. 이들은 학폭에 무관심하거나, 묵인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래서 방관하는 교실 내 ‘공기’를 바꾸자는 게 방관자 교육의 목표다.
방관자 교육까지 등장하는 이유는 일본의 이지메가 보험 가입 단계에 접어들었을 정도로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최대 손해보험회사인 도쿄해상일동화재가 가을부터 ‘이지메 보험’을 판매한다. 학생이 학폭 피해자가 됐을 경우에 대비해 변호사 비용, 심리상담비, 전학 후 새 교복비 등을 일정 한도 내에서 보상한다. 그만큼 일본 사회에선 교내 집단 따돌림과 폭력이 끈질기게 반복되고 있다. 보다 못한 교육 전문가들이 방관자 인식 전환을 꺼내든 이유다.
2005년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일본과 영국 교실을 비교한 결과 교내 괴롭힘이 벌어졌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이 일본은 61.3%, 영국이 41.8%였다. 반면에 ‘그만두라고 한다’ 등을 선택한 응답자는 영국이 45.3%, 일본은 21.8%였다. 즉 당시 조사에서 이른바 ‘방관자’ 대 ‘중재자(통보자)’의 비율이 영국에선 4대 4였는데 일본에선 6대 2로 일본 교실의 ‘방관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18년이 지난 지금도 이 같은 사회적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일본에선 남의 일에 개입하는 걸 꺼린다.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이지메방지대책추진법’이 생겨난 2013년 18만 건이었던 전국 초·중·고 이지메 인지 건수는 2016년 32만 건으로 늘었고, 2019년엔 61만 건까지 폭증했다. 코로나19로 출석 일수가 많지 않았던 2020년 51만7000건으로 잠시 줄었지만 2021년에는 61만5000건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2021년 도쿄의 한 초등학교 6학년생이 “나는 너희의 장난감이 아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학생을 끊임없이 괴롭힌 도구는 학교에서 학습용으로 나눠준 태블릿이었다. 가해 학생들이 태블릿에 “기분 나쁘다” “죽어버려”라는 욕설 문자를 계속 보냈고, 괴롭힘은 피해 학생이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같은 반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이지메를 지켜봤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는 없었다.
결국 이지메는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교정 및 처벌 외에 방관자 교육이라는 3중 해법으로 가야 한다는 게 방관자 교육을 주창한 이들의 판단이다.
방관자 교육은 일본의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 연관이 있다. 일본에선 개인이 집단의 정체성에서 일탈하지 않은 채 순종하는 집단주의 문화,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 긋기의 문화가 지금도 사회 전반을 지배한다.
이지메 근절을 위해 활동해 온 마시모 마리코 변호사는 “방관자 교육이란 친숙한 말로 하면 ‘공기를 바꾼다’는 것”이라며 “관중이나 방관자가 ‘예스(YES, 문제 없다)’의 공기를 만들면 이지메 행위는 점점 고조되고, ‘노(NO, 해선 안 된다)’의 공기를 만들어내면 이지메 행동이 억제되는 현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01년 교육학자 D 린 호킨스 등이 발표한 논문은 캐나다 토론토의 두 초등학교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괴롭힘 상황에서의 방관자 개입’을 장기간 관찰한 결과를 담고 있다. 연구 결과 ‘방관자’ 학생들이 “그만 둬!” “괴롭힘은 나빠!” 등 괴롭힘을 멈추기 위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약 60%의 괴롭힘 상황이 10초 이내에 멈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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