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北어선 무덤' 수십척…죽음의 조업 내몬 김정은 민낯

정영교 2023. 5. 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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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의 한 해안에 난파되어 있는 북한 목선.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 함경북도 동북부에 있는 나진·선봉지역과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 해안에서 난파한 북한 어선들이 무더기로 널려져 있는 '배 무덤'이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철선에 비해 내구성이 극히 약한 목선이 원해(遠海)에서 조업하던 중 난파돼 해류를 타고 러시아 해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수산물의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안전을 무시한 채 먼 바다 조업에 낡은 목선을 동원하고 있다.

현지에서 배 무덤을 확인한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10일 중앙일보에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어획량이 풍부한 동·서해의 근해어업권을 중국에 넘기고 있다"며 "이 때문에 북한 어민들과 군 수산사업소 소속 군인들이 할당량을 채우려면 낡은 목선으로 먼바다에서 조업하는 '죽음의 항해'를 피할 수 없어 벌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러시아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의 한 해안에 난파되어 있는 북한 목선. 선수쪽에 일련번호가 표기돼 있는데 이는 2017년 11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무인도 주변에서 발견됐던 북한 인민군 소속 목선(작은 사진)과 유사하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연합뉴스

실제 북· 러 국경에서 30여㎞ 떨어진 연해주 포시에트의 한 해안에는 북한 선적(船籍)으로 추정되는 난파선 수십척이 방치돼 있었다. 해안가에 처박히듯 방치된 난파선의 선수엔 기존 북한 목선에서 발견되는 일련번호가 적혀 있다. 북한 주민들이 배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군복과 가재도구도 발견됐다.

안병민 북한경제포럼 회장은 "포시에트 일대의 해안은 해류의 영향으로 원해에서 난파된 선박이 떠내려오는 지역"이라며 "수십척의 난파선이 이곳에서 발견됐다는 건 북한 당국이 무리하게 먼바다로 위험한 출항을 보낸 낡은 어선의 수가 기존에 알려진 규모보다 상당히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의 한 해안에 난파되어 있는 북한 목선의 모습. 북한 어선은 조타실 상단에 정권을 찬양하는 구호판을 붙여 놓는데(아래 작은 사진), 난파선에도 같은 위치에 붉은색 페인트의 구호 흔적이 있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원유가 부족한 북한은 엔진이 장착된 30~40m 길이의 철제 모선에 여러 척의 소형 목선(10t 미만)을 밧줄로 연결해 원해로 이동해 조업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조업 도중 유지·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소형 목선들이 침몰하거나 고장이 나 해류에 떠내려가는 경우가 많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같은 북한 난파선은 아키타현 등 일본의 서쪽 해안에서도 나타난다. 단 일본에선 해안에 밀려온 난파선의 해체·소각 등 처리 비용을 국비로 지원하고 있어 러시아 해안과 같은 배 무덤이 형성되진 않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의 한 해안에 난파되어 있는 북한 목선의 모습. 사진은 난파선 내부에서 발견된 찢겨진 북한 군복. 사진 강동완 교수

동력도 없는 낡은 목선을 타고 먼 바다에서 이뤄지는 위험한 조업은 김정은 정권 들어 가속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김정은 정권은 수산업을 대표적 수출 산업이자 주민들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복합적인 용도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조치로 2017년 8월 유엔 안보리(대북제재 결의 2371호)와 중국 상무부(공고 제40호)는 북한산 수산물을 수출 금지 품목으로 지정했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수산물 밀수출이나 동·서해 근해어업권을 중국에 판매하는 방법 등으로 국제사회 제재의 틈새를 파고들었고, 특히 근해어업권을 중국에 판 이후 북한 당국은 주민들을 먼 바다로 내몰고 있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인 2013년부터 수산업 관련 기관을 32차례나 방문하며 수산물의 증산을 주문했다. 그는 2016년 5월 7차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사철 바다를 비우지 말고 적극적인 어로전을 벌려 물고기 대풍을 안아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신문은 지난 3월 26일에도 '당의 부름이라면 만리대양도 용감하게 넘고 헤쳤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60~70년대 수산부문에서 80만t 어획량을 달성했던 시기를 조망하며 주민들에게 '목숨을 건 조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12월 '겨울철 집중 어로전투'가 한창인 동해지구의 수산사업소들을 시찰하는 모습. 김정은은 냉동고에 쌓인 수산물을 보고 만족을 표시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에선 최고지도자의 지시를 달성하기 위해 풍랑이 거센 겨울철에도 낡은 목선을 타고 조업에 나서도록 주민들을 강요하고 있다. 또 북한은 군부대 산하에 1월8일수산사업소, 5월27일수산사업소, 8월25일수산사업소, 15호 수산사업소, 18호 수산사업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사업소 앞에 붙은 날짜는 '김씨 일가'가 해당 부대를 방문한 날을 뜻한다. 북한 당국이 일반 주민뿐 아니라 군인들까지 수산물 증산 사업에 대거 투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정유석 IBK경제연구소 북한경제팀 연구위원은 "북한 당국의 근해어업권 판매로 낡은 목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북한 어민들은 목숨을 걸고 원해로 내몰리는 형편"이라며 "특히 북한이 팔아넘긴 어업권은 한·중 간 외교 갈등의 불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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