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그 연설이 미국을 홀린 진짜 이유
"한·미동맹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로 맺어진 가치 동맹이다."
23번의 기립박수가 터진 43분간의 연설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지난달 27일(미국 현지시간)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건 윤석열 대통령의 영어 실력이었다.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영어 강사' 오성식씨가 "영어에도, 스피치에도 일가견이 있더라. 정말 만점이었다. 영어 실력이 제 상상을 초월했다"고 평가했다. 북핵·북미 관련 주요 보직을 두루 섭렵한 경력 38년의 외교관 출신도 사석에서 "발음이 나보다 훨씬 좋고, 영어 실력도 나보다 위"라고 고백했으니 굳이 다른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겠다.
영어 발음보다 솔직히 더 놀랐던 건 대통령의 '무대 매너'였다. "백악관엔 BTS가 먼저 갔지만, 의회엔 다행히도 제가 먼저 왔다"며 적절한 타이밍에 농담을 섞었다. 우리 기업이 공장을 지은 지역의 의원들을 일으켜 세우며 '정밀 타격'하는 장면도 있었다. 당연히 사전 연출이 있었겠지만 무대 울렁증이 있는 이들은 소화하기 쉽지 않은 퍼포먼스였다. 시선 처리나 동작들에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별로 없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위축되거나 겁먹지 않는다는 특유의 강심장이 외교 무대에서 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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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영어 연설에 미 강한 호응
극한 진영 대결에 지친 미국인들
자유·법 지배 등 가치 화두에 열광
」
미 CBS 방송이 유튜브에 올린 영상의 조회수가 16만회를 넘는 등 흥행도 기대 이상이었다. 92세의 한국전 참전 용사가 "한국을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헌신을 지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글을 올리자 윤 대통령이 "진심 어린 메시지에 감사드린다"란 답글을 단 그 영상이다. 대통령실은 "평범한 미국 시민들도 공감을 보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 터져나온 의원들의 반응이나 아직도 워싱턴 정가에 남아있다는 연설의 여운은 단순히 영어 발음이나 퍼포먼스의 완성도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정치에 밝은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이 설파한 과거 미국의 모습과 현재 미국이 직면한 현실의 차이에 주목한다.
"자유 속에 잉태된 나라,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신념에 의해 세워진 나라, 미 의회는 234년 동안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함께 자유를 지켜낸 미국의 위대한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공동체의 정치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피와 땀으로 지켜온 소중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도록 힘을 합쳐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시민의 자유를 지키고 확장하는 ‘자유의 나침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등 과거 미국의 가치들은 트럼프 시대를 거치며 희석돼 왔다. 트럼프의 기소는 정치보복 대신 협상과 타협으로 갈등을 풀어온 미국 정치의 전통까지 바꿔놓았다. 진영 대립도 극심해졌다. 이런 현실에 지친 미국인들이 그동안 잊고 살았던 미국적 가치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윤 대통령이 제공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연설 속에 등장한 한·미 동맹이란 거울을 통해 미국인들이 자신의 원래 모습과 마주하게 됐다는 뜻이다. '자유'가 신념인 윤 대통령의 가치 중심 연설이 우리에겐 익숙한 레퍼토리지만, 미국인들은 다른 각도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대통령 연설을 보도한 일본 언론들 역시 공교롭게도 "자유란 표현을 40회 이상 사용했다"(요미우리)며 이 부분에 주목했다. 개별 현안 대신 큰 틀에서 묵직한 화두를 던지겠다는 윤 대통령의 연설 전략이 결과적으로 맞아 떨어진 것일까.
극단적 정치 양극화와 상대의 악마화, 진영 대결로 인한 마음의 병은 한국인들이 미국인들보다 결코 덜 하지 않다. 미국인들 마음을 움직인 윤 대통령이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못 살 이유가 없다. 취임 1주년, 새로운 다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돼야 한다.
서승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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