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뱅크런에 비트코인으로 ‘피난’ [’안전한 위험자산’ 비트코인]
‘비트코인, 10만달러로 가는 길’.
스탠다드차타드(SC)가 최근 내놓은 보고서 제목이다. ‘2024년까지 비트코인 가격이 10만달러에 도달할 것’이라는 게 핵심 내용이다. 5월 3일 기준 비트코인 가격은 2만8500달러. 1년 만에 가격이 4배 가까이 뛴다는 ‘장밋빛 전망’이다. ‘루나·테라 사태’ ‘FTX 파산 사태’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며 코인 시장이 극도로 위축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얘기라 더욱 파격적이다.
물론 비트코인 낙관론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부터 심심하면 되풀이되는 ‘밈’처럼 여겨져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느 때처럼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아니다. 전통 금융권에 속하는 글로벌 금융사가 내놓은 전망인 데다 ‘설득력 있다’는 인식이 투자자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탠다드차타드만의 분석이 아니다. 블룸버그 산하 경제연구소 블룸버그인텔리전스(BI) 역시 올해 2월부터 꾸준히 10만달러설을 펼치고 있다. 세계 채권 시장 자금의 1%만 비트코인으로 이동하면 가격이 18만5000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봤다. 이 밖에 수많은 금융기관과 경제연구소에서 비트코인 낙관론을 쏟아내고 있다.
최근 급등하고 있는 비트코인 가격이 이런 변화된 심리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5월 3일 기준 연초 대비 비트코인 가격은 72% 올랐다. 연초 1만6500달러로 최악의 출발을 했던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 3월 2만8000달러 수준으로 뛰었다. 지난 4월에는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3만1000달러를 터치하며 연초 대비 2배 가까운 상승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은행 파산설마다 비트코인 가격 ‘급등’
‘비트코인 강세론’이 과거와 다르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는 최근 은행을 비롯한 ‘전통 금융’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전통 금융에 불안을 느낀 투자자들이 대체 투자처이자 피난처로 비트코인을 선택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가격이 급등하며 비트코인이 웃었던 지난 3월은, 기존 금융에는 반대로 악몽 같은 기간이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이다. 금리 인상으로 유동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SVB에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 ‘뱅크런’이 일어났다. 헐값이 된 미국 채권을 급하게 팔다 결국 현금 확보에 실패한 것. 금융위기가 무서운 점은 연쇄 효과 때문이다. 위기는 유럽까지 번져갔다. 세계적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가 잇단 투자 실패로 파산 위기에 빠졌다 경쟁사인 UBS에 인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독일 최대 은행 도이치방크를 비롯해 독일 코메르츠방크와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도 금융위기설이 제기되며 주가가 폭락했다. 미국부터 유럽까지 뱅크런 이슈가 있었던 지난 3월 한 주 동안 비트코인 가격은 30% 급등했다.
다소 잠잠해졌나 싶던 금융위기는 최근 샌프란시스코 지역은행 ‘퍼스트리퍼블릭’으로 재점화 됐다. 고객 예금이 130조원 이상 빠져나가는 뱅크런 사태를 맞이하며 지난 4월 파산했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이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을 인수하고 나섰지만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뉴욕 증시에서 지역 중소 은행 중심으로 금융주 전반이 폭락했다. JP모건, 씨티그룹 등 미국 4대 은행 주가도 동반 하락세를 기록했다.
이번에도 비트코인은 웃었다. 퍼스트리퍼블릭 주가가 폭락한 4월 25일과 26일, 비트코인 가격은 이틀 동안 각각 100만원 이상 뛰었다. 퍼스트리퍼블릭 사태 이전 2만7000달러대에서 3만달러까지 치솟았다. ‘전통 금융위기 = 비트코인 상승’이라는 공식이 두 번이나 확인된 셈이다.
이런 현상은 애초 비트코인 설립 목적과도 맞닿아 있다. 비트코인은 기존 전통 금융에 반기를 드는 취지로 만든 코인이다. 비트코인이 최초로 발행된 2009년은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던 2008년 이듬해다. 당시 미국 연준은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내 거대 기업과 금융기관 살리기에 나섰다. 덕분에 금융기관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물가가 치솟았고 그 대가는 소비자가 치러야 했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과도하게 중앙화된 화폐가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트코인을 만들었다. 이른바 ‘탈중앙’이다.
최근 또 한 번 금융위기설이 재점화되면서 비트코인 탈중앙에 대한 가치가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비트코인은 ‘사람들의 돈’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나 각국 중앙은행 보증이 필요 없다. 대중이 정부와 연준 대신 비트코인을 지지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제프 켄드릭 스탠다드차타드 애널리스트 역시 “현재 전통적인 은행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가 비트코인에 매우 우호적”이라며 “비트코인이 탈중앙화하고 희소성이 있는 디지털 자산이라는 원래의 존재 가치를 최근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디널스 등장…신규 유입 늘어나
비트코인은 그동안 대표적인 ‘위험자산’으로 분류됐다. 다른 것보다 ‘가격 변동’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뱅크런과 은행 파산 사태를 겪은 투자자 입장에서 오히려 ‘비트코인이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져나가고 있다.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최소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코인 전문 투자자는 “최근 비트코인을 놓고 ‘위험한 안전자산’이라는 형용모순적인 표현까지 통용될 정도로 인식이 달라졌다. 가격 변동이 심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주식이나 다른 파생상품과 비교하면 최근에는 오히려 가격이 안정적으로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비트코인이 안전자산으로 위상을 갖게 됐다는 근거는 또 있다. 비트코인이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금’과 점점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비트코인과 금 가격 사이 상관관계가 역사상 최고치에 달했다. 코인 빅데이터 AI 플랫폼 ‘코싸인’에 따르면 비트코인-금 상관계수가 지난 4월 26일 0.93을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과 비트코인 평균 가격이 93%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비트코인과 달러 가격 상관관계는 최저로 떨어졌다. 지난해 말 0.9에 달했던 비트코인-달러 상관계수는 올해 5월 2일 기준 -0.9로 추락했다. 금융위기에 따른 ‘탈(脫)달러’ 현상이 비트코인 가격 급등을 견인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종환 랩투아이 대표는 “과거에도 금과 비트코인 사이 동조 현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나스닥 동조화율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최근 금리 상승기를 거치면서 시장에서 비트코인이 달러 헤징 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가치 저장 수단 외에 실제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비판도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최근 비트코인으로 NFT(대체불가능토큰)를 발행할 수 있는 프로토콜 ‘오디널스’가 등장하면서다. ‘오디널스’는 사토시라는 비트코인 최소 단위에 이미지와 텍스트 등의 콘텐츠를 입히는 방법을 사용한다.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플랫폼 듄애널리틱스에 따르면 비트코인 NFT 프로토콜 오디널스 거래량은 4월 1일 약 1만1700개에서 한 달 후인 5월 1일 약 36만6000개까지 급증했다. 오디널스 거래량 증가는 곧 비트코인 거래 증가를 의미한다. 여기에 비트코인 처리 속도를 향상시키고 스마트 컨트랙트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 ‘스택스(STX)’ 같은 프로젝트 역시 활용성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코인 전문 투자 운용사 ‘그레이스케일’ 관계자는 “오디널스 등장 이후 비트코인 채굴자에게 지급되는 수수료가 증가했다. 채굴자에게 돌아가는 수수료가 늘어날 경우 비트코인 블록체인 네트워크 수명이 길어지고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며 “NFT 등 활용성이 늘어나면 신규 이용자도 더 많이 유입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블록체인업계 관계자는 “비트코인은 위변조가 불가능하고 추적이 어려워 이전부터 마약·무기 거래 등 지하 시장에서 수요가 분명했다. 비트코인이 야기하는 부작용이기는 하지만 실수요만 따지고 보면 다른 코인이나 자산보다 훨씬 더 명확한 수요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반감기는 호재, 매도 물량은 압박
코인 투자자 입장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결국 비트코인을 지금 사도 될까다. 전통 금융위기로 비트코인이 최근 주목받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린다.
2024년 4월 예정돼 있는 ‘반감기’는 호재로 분류된다. 반감기는 비트코인 채굴 보상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점이다. 비트코인은 지금까지 3번의 반감기를 거쳤는데, 반감기 전후로 비트코인 가격이 크게 오른 바 있다. 채굴 보상이 줄어 희소성이 더 올라가는 만큼 시가총액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제이미 커츠 블룸버그인텔리전스 애널리스트는 “과거 반감기를 기준으로 볼 때 비트코인 가격은 2024년 4월 5만달러(약 6700만원)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반감기’ 호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모델도 있다. ‘S2F(Stock-to-Flow)’ 모델이다. 특정 자산 총 공급량과 연간 채굴량 비율을 나타내는 ‘SF 비율’을 이용해 가격을 예측하는 모델이다. ‘자산 보유량(Stock)’과 ‘해당 자산이 새로 생산되는 속도(Flow)’ 사이 비율로, SF 비율이 높을수록 희소성이 크고 희소성이 클수록 가격이 높다고 설명한다. S2F 모델을 제시한 세계적인 코인 애널리스트 ‘플랜비(필명)’는 “비트코인은 저평가돼 있다. 2019년 비트코인 SF는 약 29로 다이아몬드(19)보다 훨씬 높았지만 시가총액은 3분의 1 수준이었다”며 2020년 반감기 이후 8000만원까지 오를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게 그대로 맞아 떨어지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상승세 지속을 확신할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가장 큰 리스크는 역시 ‘규제’다. 향후 코인 법적 성격이 ‘증권’으로 분류될 경우 시장 전체 타격이 예상된다. 최근 게리 겐슬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이 ‘비트코인을 제외한 모든 코인은 증권’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비트코인은 논쟁의 중심에서는 한발 비껴갔지만,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코인이 증권으로 인정될 경우 현재 코인 거래소 등 가상자산 사업자는 당장 ‘허가(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 기존 사업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과거 대비 비트코인 유통량이 적다는 점도 약세론의 근거 중 하나다. 코인 시장 분석 플랫폼 글래스노드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시장에 유통된 비트코인 중 ‘지난 1년간 한 번도 거래되지 않은 물량’ 비율은 68%로 사상 최고치다.
권세환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역사적으로 ‘지난 1년간 한 번도 거래되지 않은 물량’ 비율이 높아질 때는 비트코인 가격이 하락한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잠재 매도 물량이 쌓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며 “비트코인을 고위험 투자 상품으로 인정하고 포트폴리오 자산 분산 차원에서 투자를 논해보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8호 (2023.05.10~2023.05.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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