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고등학교에 불어닥친 '0교시' 바람...민망하다
[서부원 기자]
▲ 2021년 10월 19일 오후 경남 창원시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공부시켜 준다는데 마다할 학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대학 입시 공부에 치여 사느라 하루 네다섯 시간도 못 자는 아이가 불쌍하긴 해도 다들 악착같이 견디는 수험생활이니 어쩔 수 없잖아요."
"어차피 일찍 학교가 파해도 죄다 곧장 학원과 스터디 카페로 가는 마당인데 아이들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야간자율학습(야자)을 금지하자는 건 흰소리일 뿐이죠."
"학교가 아이들을 일률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경제적 형편에 따라 사교육의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주말에도 등교시켰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학교 내 방과 후 수업과 야간자율학습(야자) 운영에 대한 학부모들과의 상담 때 나온 이야기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구동성 '아이들은 가엾지만, 학교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관리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제 야자'와 이른바 '0교시'조차도 하등 문제 될 게 없다는 식이다.
매주 수요일 광주 고교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교사로서 듣자니 괴롭고 딱히 반박할 수도 없다. 일례로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로 운영되는 매주 수요일, 방과 후에 입시 공부 외에 별도의 취미 활동을 즐긴다는 아이는 거의 없다. 아예 당일 교문 앞에는 아이들을 실어나르는 학원 버스가 장사진을 이룬다. 사교육 입장에선 '대목'인 셈이다.
애초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은 아이들과 교사들이 학교 수업을 벗어나 일주일 중 하루쯤 재충전하는 기회로 활용하도록 추진됐다. 당장 동아리 활동과 도서관이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됐다. 지역의 문화 체험 시설과 연계된 활동도 늘어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여겼다.
취지는 나무랄 데 없었으나 현실은 각박했다. 아이들은 학원 공부까지 하느라 귀가 시간이 더 늦어졌고, 학부모들은 그만큼 늘어난 사교육비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활성화하리라 기대했던 동아리도 도서관도 이전에 견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저 하교 시간만 앞당겨진 것이다.
이름만 번드르르할 뿐 변한 게 없어선지, 불똥은 느닷없이 교사를 향해 튀었다. 아이들의 하교 시간이 곧 교사의 퇴근 시간이다 보니, '매주 수요일은 교사들을 위한 복지 정책 아니냐'며 눈을 흘겼다. 일부에선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은 '광주 교사의 날'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이럴 바에야 수요일도 주중 다른 요일과 마찬가지로 야자를 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아이들조차 '수요일은 스터디 카페에서 야자하는 날'이라며 맞장구를 친다. 친구들이 다 공부하는데 나만 놀 수 없지 않냐는 그들의 말은 전가의 보도다.
'0교시' 부활 조짐
이 와중에 10여 년 전 사라졌던 '0교시'조차 부활할 조짐이다. 일부 학부모들은 대놓고 '0교시' 실시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등교 시간이 앞당겨지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새벽녘까지 잠 안 자는 자녀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바람까지 전했다.
자녀가 평소 새벽 3시에 잔다는 한 학부모는 잘못된 늦잠 습관을 '0교시'로 고칠 수 있다고 단언했다. 등교 시간이 1시간 앞당겨지면, 잠자는 시간도 1시간 앞당겨질 거라는 생각에서다. 어차피 밤새 스마트폰 만지작거릴 바에야 비몽사몽일지언정 수업을 듣는 게 낫다는 게다.
과거 '0교시'가 공식 폐지될 당시, 주저하던 여론을 돌려세웠던 핵심 주장은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고 등교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성장기인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보장하자는 말보다 훨씬 강력한 메시지였다. 기실 '학습권보다 건강권'이라는 주장도 여기서 비롯됐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주장은 무색해졌다. 학급 내에서 매일 아침밥을 먹고 등교한다는 아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되레 아침을 먹으면 속이 불편하다는 아이도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삼시 세끼'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이름일 뿐,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교과를 불문하고 오전 수업 시간 교실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맥없이 축 처져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아침을 먹고 왔느냐고 부러 물어보면, 한결같이 '밥보다 잠'이라고 대답한다. 밥 챙겨 먹을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겠다는 뜻이다.
'0교시'가 사라졌어도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지 못하는 현실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정확하게는, 당시의 '0교시'는 지금 아이들에게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학부모들이 '0교시'의 폐지가 그저 아이들의 수면 리듬만 변화시켰다고 조롱하는 까닭이다.
▲ 지난 3월 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
ⓒ 연합뉴스 |
"오로지 대학 입시를 위해 아이들이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는 하느님이 와도 해결하지 못할 겁니다. 그저 사교육비 몇 푼이라도 줄일 수 있게 학교가 도와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주말에도 아이가 등교했으면 좋겠다는 한 학부모의 푸념이다. 중고생인 두 아이의 주말 학원비만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면서, 그나마 다른 집에 견줘 적게 드는 편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아이 한 명에 100만 원을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귀띔해줬다.
남들 다 가니 불안해서 학원에 보내지만, 불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수강료가 얼마짜리 학원에 다니느냐를 두고도 학부모의 처지에선 주눅 든다고 고백했다. 수강료의 차이에 따라 강의의 질이 다른 것 같다는 아이의 하소연을 듣는 건 부모로서 괴롭다는 거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경제력에 따른 학력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경제력이 학력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학교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그러니 애초 학원에 다닐 엄두가 나지 않도록, 학교에서 주중이고 주말이고 아이들을 붙들어달라는 거다.
그는 자녀의 학원비로 한 달에 수백만 원쯤 흔쾌히 쓸 수 있는 부잣집이라면 몰라도, 형편이 어려운 학부모들 대다수가 '강제 야자'와 '0교시' 실시에 찬성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적어도 돈 때문에 차별을 당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싶다는 뜻이다. 나아가 그는 사교육을 우리 사회에 가장 불평등한 분야라고 손꼽았다.
▲ 이정선 광주광역시교육감 |
ⓒ 광주시교육청 |
사실 방과 후 수업과 야자 운영에 대해 학부모들과 상담하게 된 건, 얼마 전 광주광역시교육청의 생뚱맞은 공문을 받고서다. 교육청은 정규수업 이외의 교육활동을 학교 자율에 맡긴다는 내용의 지침을 발표했다. 이정선 교육감은 후보 시절부터 지금껏 '실력 광주'를 표방해왔다.
교육청은 "학생의 학습 선택권과 학교의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동시에 "학생의 희망과 선택을 제한하는 파행적이거나 획일적인 교육에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언뜻 당연한 이야기일뿐더러 지금껏 학교마다 해오던 방식이어서 굳이 공문을 보낼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광주의 일선 학교는 이 느닷없는 공문을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을 폐지하고, '강제 야자'와 '0교시'를 부활해도 좋다는 교육청의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했다. 학교의 반응은 전광석화였다. 광주 관내 인문계고의 절반 이상이 '자율적으로' 등교 시간을 조정하고 야자를 편성 운영하고 있다.
일부 교사와 학부모, 시민단체가 완강히 반대하고 있으나, '학교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의 화살을 피하고 있다. 학교가 알아서 한 걸 두고 교육청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투다. 늘어나는 사교육비와 치열해지는 경쟁에 절망한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이를 수수방관하는 모양새다.
몇몇 사립학교는 아예 총대를 멨다. 해당 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담임교사가 경쟁적으로 방과 후 수업과 야자 참여를 강제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학부모 대상 입시 설명회 자리에서 대입 전형 자료인 학교생활기록부를 들먹이며 참여를 독려했다고도 한다.
'실력 광주'를 내세운 현 교육감 체제에서 관내 학교의 '강제 야자'와 '0교시' 부활은 시간 문제로 여겨진다. 이미 그도 모자라 이른바 '주말 자습'까지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는 학교도 있다. '월화수목금금금'이 돼가는 아이들의 일상은 광주교육의 급속한 퇴행을 증명한다.
'학습 선택권'도 좋고 '학교 자율'도 좋지만, '강제 야자'와 '0교시'를 두고 '실력 광주'를 위한 대책이라고 하기엔 적이 민망하다. 반교육적이라는 이유로 십여 년 전 폐기된 방식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듯 두둔하는 이정선 교육감의 인식이 안타깝다. 명색이 교육대학 총장까지 역임한 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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