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교육도서관에는 컴퓨터실이 없습니다, 대신

박태신 2023. 5. 1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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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시장부터 도서관까지... 읍내를 누리는 '편협한' 여행

[박태신 기자]

▲ 개양귀비 들판 단양강 '느림보강물길'에 조성된 개양귀비 들판.
ⓒ 박태신
4일 오후, '단양강 잔도'를 나와 읍내 쪽으로 걸었다. 단양읍은 차도 옆 보도뿐 아니라 그 아래 단양강 수변 길을 잘 조성해 놓았다. 일명 '느림보강물길'인데 트레킹 코스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강물길'에서 하늘하늘한 것이 보였다. 개양귀비였다. 그냥 평지에 피어 있었으면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비탈진 곳에 많지도 않게 다소곳한 느낌이 들 정도로만 피어 있었다. 단번에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 생각났다. 

검색해 보니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을 연상한 것이다. 그림에서는 양귀비 들판 따라 부인 카미유와 아들 장이 걷고 있다. 근심이 낮잠에 들었을 때의 풍경 같다. 나도 꽃의 유혹을 받아 개양귀비 들판을 걸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양귀비든 개양귀비든 화가의 풍경화를 연상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지난번 기사에 소개한 '단양길 잔도'에서는 내가 요즘 자주 듣는 음악도 나왔다.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1번 2악장. 느린 템포라 차분함이 느껴지는 까닭에 좋아한다. '단양길 잔도' 앰프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거의 다 차분했다.

벼랑길을 걷고 있는데 빠른 템포의 음악이 나오면, 거기다 단양강 강물이 바람 때문에 급물살을 타고 있는 상태라면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지 않을까. 벼랑에서는(삶의 급박한 순간에서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위 쇼팽의 곡(2악장)처럼 라르게토(조금 느리게) 또는 안단테(느리게) 템포가 절실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단양 여행에서 은은한 맛(그림 같은 풍경과 음악), 씁쓸한 맛(두 개의 철교), 황홀한 맛(전망대)을 경험했다. 그런데 나는 매운 음식 또한 좋아한다. 맛있게 매운 음식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나는 그런 음식 재료 중 하나인 마늘이 풍성한 곳으로 가고자 한다. 단양 구경시장이다. 마늘은 단양의 최고 특산품이다.

구경시장

시장은 물건도 사지만 나로서는 구경하러 가는 곳이다. 그런데 단양의 구경시장은 꼭 '구경'도 하고 먹기도 해야 하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단양 마늘이 있어서다. 마늘 강정, 마늘 통닭, 마늘 떡갈비, 마늘 빵. 원래 마늘을 좋아하는 나는 그것도 별미의 마늘을 맛볼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어서 단양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1박 2일 단양 여행의 세 끼 중 나는 두 끼를 '단양 토종마늘순대'라는 식당에서 순대국밥으로 해결했다. 물론 마늘이 들어간 순대국밥이다. 첫째 날 거의 마지막 손님으로, 둘째 날 거의 첫 손님으로 마늘 순대국밥을 마음껏 먹었다. 반찬으로 나온 생마늘과 마늘쫑을 통해 단양 마늘의 알싸하면서도 싱싱한 맛을 알 수 있었다.

어느 포스터를 보니 단양 마늘에 '명작'(名作)이라는 별칭을 붙여 놓았다. '타칭'이 아니라 '자칭'이어도 나는 기꺼이 인정하겠다. 미각이 둔한 편인 나는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이곳 순대국밥 맛은 거칠지 않았다. 국물 맛이 부드러워서 다대기와 새우젓을 계속 넣었는데도 맵거나 짜지 않았다.

현지의 음식을 맛보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부산의 돼지국밥이 서울에서, 강화도의 순무가 서울에서 본래 맛을 내기란 아주 힘든 일이다.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길고양이 검은 고양이가 문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주인이 먹이를 주었는데도 어느새 식당 안 방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이 녀석도 이곳의 맛과 향을 아나보다. 음식 사진은 잘 찍지 않는 편이라 글로만 보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젠 맛이 아니라 멋을 이야기할 차례다.

단양 교육도서관
 
▲ 단양 교육도서관.  도서관 내 대형 유리창에 특색 있는 도서관의 조명시설이 비친 모습. 앞 건물은 상진초등학교이다.
ⓒ 박태신
첫째 날 네시 반쯤 단양에 도착하고서 부러 택시를 타고 처음 찾아간 곳은 '단양 교육도서관'이었다. 급하게 보내야 할 문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택시 운전사는 이 도서관 위치를 몰랐다. 휴대폰 네이버 지도를 통해 겨우 찾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서관은 지난달 4월에 오픈했다.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인 나는 도서관 앞에서부터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서니 더욱 그랬다. 도서관이 정말 독특했다. 전시회장 같기도 하고 서점 겸 카페 같기도 했다. 책과 분위기를 동시에 중요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튤립 화병, 쿠션, '책 읽는 소녀' 간이 책꽂이 등 갖가지 소품들이 내 눈을 끌었다. 한쪽으로 유리 지붕도 있었다.

당장 급한 것이 문서 작성이어서 사서에게 문의했더니 컴퓨터실은 따로 없단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려 할 무렵 대신 필요한 이에게 노트북을 대여한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래서 1층 대형 창 앞 1인 책상 앞에서 가져다준 노트북으로 작업을 했다. 보통 웬만한 도서관은 여섯 시면 컴퓨터실이 문을 닫는데 이곳은 방식이 달랐다. 노트북 대여 세 시간이 관건이었다. 나는 여섯 시에 빌렸으니 아홉 시까지 사용 가능했다.
 
▲ 도서관 열람석 단양 교육도서관 2층에 구비된 1인용 소파. 연노랑 벽면과 진한 노랑 소파가 도서관에 화사함을 보태준다.
ⓒ 박태신
 
▲ 단양 교육도서관 노트북 작업이 가능하도록 배치된 1인용 책상과 의자.
ⓒ 박태신
둘째 날 오후에도 도서관에 들렀다. 이번엔 차근차근 살펴볼 요량이었다. 사서의 허락을 받고서 도서관 이곳저곳을 폰 카메라에 담았다. 서재에서 꺼낸 단양 관련 책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야말로 이곳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이었다. 서재가 특정 공간에 집중돼 있긴 했어도 방으로 분리돼 있지 않았다. 복도 이곳저곳에도 서재가 분산돼 있었다. 칸막이 열람실은 아예 없고 1인용 책상과 기다란 책상, 소파가 열람 좌석이었다. 

대신 독특한 이름으로 도서 영역을 구분하고 있었다. '책둥지'(영유아자료), '책마루'(어린이자료), '책숲'(청소년자료), '책뜨락'(일반자료)이 그렇다. 특히 '책숲'은 책으로 둘러싸인 다락방 같았다.

어떻게 이런 도서관을 사설 기관이 아닌 군(郡)에서 만들 수 있었을까. 보통의 도서관들처럼 실용 중심의 공간 구분이 아니라 분위기 중심의 도서관을. 학생들을 위해 간식도 마련해 놓는 도서관을.
 
▲ 단양 교육도서관 서점 겸 카페 같은 아늑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멋진 도서관.
ⓒ 박태신
정수기가 어디 있냐고 한 초등학생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2층 뒤쪽을 가리키며 "얼음도 있어요"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얼음도 나오는 정수기라는 걸 짐작했지만 신선놀음 같은 초등학생의 답변이었다. 조선시대 서원에 거주하는 어린 유생 같았다.

단양역

열차 시간에 맞춰 도서관에서 나왔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고 버스도 많지 않은 이곳, 나는 정류장 앞 아이스크림 상점주인 덕에 해당 버스를 타고 단양역에 갈 수 있었다. 정류장에서 같이 탄 온 젊은이에게 잔도 가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자연을 보러 이곳저곳 걸어 다녔다고 했다. 젊은이의 물들지 않은 마음이 느껴졌다. 단양역에서 바라본 노을은 또 하나의 그림이었다.

나는 본래의 단양팔경은 한 곳도 들르지 않고 '인공의 단양팔경' 세 군데를 들렀다. '단양강 잔도', '단양 구경시장', '단양 교육도서관' 이걸로도 만족했다. 입석 열차를 타고 힘겹게 상경했어도 마음은 부자였다. '편협한' 여행이었어도 상관없다. 다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좋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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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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