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공감하지 못하는 '한국 귀신' 이야기
[윤일희 기자]
지인이나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참 사는 게 다르구나 하다가도 한 지점에서 만나지는 경우가 있다. 자신들의 엄마나 현재 자신들의 엄마 됨에 관한 주제에서다. 물론 이 또한 격차가 크지만, 그 지난함과 가해와 피해가 중첩된 애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공통된 감정을 만나게 된다.
▲ 영화 < UMMA > 스틸 이미지. |
ⓒ 소니픽처스코리아 |
엄마와 딸의 불화에서 시작된 공포물
영화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 출신 엄마와 딸(산드라 오)의 불화를 공포물로 그린다. 한복 디자이너였지만 미국으로 이주해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좌절한 엄마의 파괴된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는 외국인에게 낯선 '한'의 개념을 들여온다.
외국인에겐 매우 낯선 개념일 텐데, 그렇다고 한국인들, 특히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보며 '한'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닐 듯하다. 게다 영화가 한국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영화적 도구인 엄마의 헤어스타일과 한복과 탈 그리고 무엇보다 옛날 문어체 한국 말투는 이 영화가 60년대에 만들어진 것 아닌지 착각할 정도로 낡았다.
이렇게 한국 엄마나 한국 정서를 어색하고 조악하게 형상화하는 방식은 비단 이 영화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양부모의 잘못으로 국적을 획득하지 못해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의 이야기를 그린 <푸른 호수>에서도 이질적 형상화는 유사하게 시도된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주인공이 그리는 엄마의 형상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쪽을 찐 모습으로, 일제시대나 해방기의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한마디로 넌센스다.
이 영화들의 어색한 엄마 형상화는 오히려 외국인들이 이미지화한 한국 엄마들의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한국인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때 그 시절 엄마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그리는 디아스포라(기자주 :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혹은 이주 자체를 의미함) 모녀관계는 어떨까? 이들은 어째서 호러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엄마는 미국 이주 후 자신감을 잃고 붕괴된다. 남편이 떠나고 주변인이 외면하면서 엄마와 딸은 고립된다. 이럴 때 가장 위험에 처해지는 건 당연히 어린아이다. 심신이 피폐해진 엄마는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고립된 세계에서 어린 딸은 엄마를 잃을까 두려워 엄마의 가학에 복종했을 것이다. 폭력에 놓여진 어린아이의 몸과 마음이 심대한 내외상을 입는 건 자명하다.
▲ 영화 < UMMA > 스틸 이미지. |
ⓒ 소니픽처스코리아 |
여기서의 의문은 심리적으로 취약해진 엄마가 아이를 괴롭힐 동안 다른 가족이나 주변인들은 무엇을 했느냐다. 왜 진즉에 엄마와 아이를 분리하고 엄마를 치료시키지 않았을까. 이런 사회적 무능과 무책임을 오로지 엄마와 딸의 지긋지긋한 숙명적 '한'의 대립으로 그리는 방식은 너무 구태하다.
인류학자 최기숙은 "귀신 이야기는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발설하는 증표"라 정의한 바 있다. 최기숙의 논지에 기댄다면, 이 영화의 귀신은 무엇에 대한 고민을 일으키는 걸까. 여자들이 죽어서 귀신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살아서 이루지 못한 비가시화된 자신들의 "존재 증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살아서 발설할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죽어서야 목소리를 가지는 것이고, 이런 까닭으로 한국 호러 영화에 그토록 많은 여자 귀신이 등장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귀신이 된 엄마가 소명해야 할 존재 증명은 딸에게가 아니라 자신을 가둔 그 무엇에 있어야 한다(엄마에게 가해진 억압조차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를 아메리칸드림으로 그린 <미나리>에서의 모녀관계를 살펴보자. 미국으로 이주한 딸과 살기 위해 엄마는 낯선 땅에 도착했다. 이미 미국에 적응해 영어에 익숙해진 손주들은 할머니와 대화하기 어렵고, 한국 스타일의 촌스러운 할머니가 탐탁하지 않다. 맞벌이 딸 부부를 조력하기 위해 애쓰지만, 엄마는 자신의 존재가 어딘지 짐같이 느껴진다. 엄마는 딸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을 떠나 미국에 왔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모든 정체성이 불연속을 겪지만, 끝까지 연명한 정체성은 딸의 가족에게 헌신하는 모성이었다. 영화는 이를 아름답게 승화시키려 하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희생이다.
(디아스포라) 모성은 주로 두 가지로 분류된다. 희생하는 엄마와 착취하는 엄마. 이토록 선명히 하나의 정체성만 가지는 엄마는 없다. 엄마 역시 엄마이기 전에 인간이다. 만 가지 인간이 존재하듯이, 만 가지 모성이 존재한다고 그려지는 게 마땅하다. 이 시대의 영화가 그리는 디아스포라 모성도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돼야 하지 않을까.
이 한계에도 < UMMA >에서 노출한 일률적이지 않은 모녀관계의 한 장면은 인상적이다. 엄마가 격앙되어 딸 크리스(피벨 스튜어트)의 따귀를 때린다. 이런 경우 보통의 한국 정서는 딸이 옳고 화가 나도, 엄마의 따귀를 올려붙이는 대갚음을 하지 못한다. 반인륜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엄마의 따귀를 올려붙인다.
이왕 반항하고 나선 김에 크리스가 엄마의 곁을 떠나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면 좋겠다. 더 이상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대로 살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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