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 최초의 가향 홍차 ‘얼그레이’ 탄생의 비밀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5. 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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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드셔보셨나요?”

이런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이 ‘녹차’와 ‘홍차’다.(녹차는 워낙 오설록 ‘현미녹차’가 유명한 바람에….)

홍차는 녹차·백차·황차·청차·홍차·흑차 6대 다류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뿐더러 소비량도 독보적인 1위다. 홍차 소비량은 전 세계 차 소비량의 60%를 넘어간다.

“그럼 좋아하는 홍차가 있나요?”

이때부터 다들 헷갈려하기 시작한다.

“그냥 홍차요.”

조금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다.

“음… 포트넘&메이슨·마리아주프레르·트와이닝스·루피시아·로네펠트·TWG 이런 것?”

안타깝게도 이건 홍차가 아니라 홍차 브랜드다. 백화점 식품관 한 편을 고급진 민트색으로 장식한 덕분에 유명해진 ‘포트넘&메이슨’은 영국, ‘마리아주프레르’는 프랑스, ‘로네펠트’는 독일, ‘TWG’는 싱가포르 차 브랜드다.

그럼 대체 홍차는 뭐지? 진짜로 홍차에 관심이 있고 즐겨본 분들은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향이 화려한 웨딩임페리얼과 마르코폴로를 좋아해요.”

딩동댕! 이 정도 얘기할 수 있다면 아주 ‘훌륭’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답하는 당신은 반쪽 홍차의 세계만 알고 있다는 사실. 위에 언급한 브랜드는 모두 서양 홍차 브랜드다. 세상에는 서양 홍차 말고도 너무나도 다채롭고 호화스러운 홍차의 세계가 존재한다.

퀴즈 하나. 세계 3대 홍차는? 영국 홍차? 완전 틀렸다. 영국에서 홍차 문화의 꽃이 피면서 영국이 홍차의 대명사 격으로 인식되지만, ‘영국 홍차’라는 것은 없다. 영국은 홍차를 수입해 브랜드화(化)했을 뿐이다.

세계 3대 홍차 ‘다르질링홍차’ ‘우바홍차’ ‘기문홍차’
영국은 홍차 수입해 ‘브랜드化’했을 뿐 ‘영국 홍차’ 없어
세계 3대 홍차는 인도 다르질링홍차, 스리랑카 우바홍차, 그리고 중국의 기문홍차다. 세 가지 홍차가 왜 세계 3대 홍차인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홍차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지역이거나 품질이 뛰어나거나 인지도가 높거나 그래서 3대 홍차로 불리는 것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인도 홍차, 우바홍차, 기문홍차보다 영국 홍차가 훨씬 세련되고 호화롭지 않겠냐고? 이 또한 편견일 뿐이다. 근사한 캔에 들어있어 수집 욕구를 ‘뿜뿜’ 자극하는 서양 홍차는 그러나 차의 세계에서는 가장 하급 차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국에서 홍차를 대부분 밀크티로 즐기는 이유가 있다. 차는 찻잎이 온전하게 보존된 ‘홀리프(whole leap) 차’를 최고로 친다(물론 홀리프 차 중에서도 다양한 기준으로 차 등급이 갈린다). 서양 홍차는 ‘홀리프 차’가 많지 않다. 찻잎이 짜각짜각 잘려있거나 믹스커피 과립처럼 몽글몽글한 수준의 CTC(Crush·Tear·Curl) 형태가 대부분이다. 이런 차는 우리면 쓰고 떫기 십상이다.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마실 수밖에 없다.

반면 홀리프 차는 우렸을 때 맛이 부드러워 한결 마시기 편안하다. 차 고유의 향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만큼, 다른 재료를 섞을 필요가 없다. 같은 이유로 가향도 하지 않는다. 다시 정리. 서양 홍차는 홀리프보다는 잘린 홍차가 대부분이다. 서양 홍차를 또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단일 지역·단일 다원 차’ ‘블렌디드 차’ ‘가향 차’다.

블렌디드 차는 여러 지역·연도 찻잎을 섞어 만든 차다. 가향 차는 단어 그대로 다양한 향을 가미한 차다. 위스키도 블렌디드 위스키보다 싱글몰트 위스키가 더 비싼 것처럼 차도 당연히 블렌디드보다 단일 지역·단일 다원 차가 더 비싸다. 당연히 지역 이름을 붙인 차보다 다원 이름까지 붙인 차가 훨씬 비싸다. ‘브루고뉴’ 라는 지역 이름을 붙인 와인보다 ‘샤샤뉴 몽라셰’라는 동네 이름이 붙은 와인이 더 비싸고, 사샤뉴 몽라셰 중에서도 밭 이름을 추가로 붙은 와인이 더 비싼 것과 똑같은 원리다.

서양 홍차 중 가장 유명한 ‘얼그레이’는 영국 그레이 수상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우리가 아는 서양 홍차는 거의 ‘블렌디드 차’와 ‘가향 차’다. ‘블렌디드 홍차’의 대표주자는 아삼티와 실론티를 혼합한 ‘잉글리시블랙퍼스트’고 ‘가향 차’의 대표주자는 베르가못 향을 첨가한 ‘얼그레이’다. 어쩌면 ‘블렌디드 차’와 ‘가향 차’를 구분하기도 애매하다. 대부분 ‘블렌디드 차’면서 동시에 ‘가향 차’라 해도 무방하다.

이 지점에서 손뼉 짝 치며 “맞다 얼그레이, 나는 얼그레이 홍차를 좋아해요” 하시는 분도 계실 터. 얼그레이는 서양 홍차 중 가장 유명한 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이 ‘영화로 보는 차 이야기’인데 영화 얘기는 언제 나오는지? 바로 여기서.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은 랠프 파인스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당시 영국 정가의 실력자였던 데본셔 공작과 데본셔 공작부인으로 열연한 영화다. ‘세기의 스캔들’의 주인공은 그럼 공작부인? 정답. 제목이 공작부인인 만큼 데본셔 공작부인이 그 주인공이다. 세기의 스캔들 상대방은 ‘찰스 그레이’, 훗날 영국 수상이 된 인물이다.

그레이 수상? 얼그레이와 연관이 있나? 이쯤 생각이 미친 당신에게 박수를. 얼그레이에서 얼(Earl)은 백작을 의미하는 단어다. 얼그레이는 결국 ‘그레이 백작’이라는 의미. 얼그레이는 바로 찰스 그레이 백작이 만들고 즐겨 마셨던 차다. 그렇다고 본인이 이것저것 첨가해가며 직접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당시 유명 홍차 브랜드였던 ‘트와이닝’이 그레이 백작이 원하던 차를 만들어준 게 바로 ‘얼그레이’라고 알려져 있다.(트와이닝이 그냥 먼저 만들어 백작이 좋아하는 ‘랍상소총’과 유사한 차라며 헌정했다는 설도 있다. 뭐가 진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얼그레이의 그레이가 그레이 백작 이름이라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국 홍차가 등장한다. 세계 최초의 홍차는 ‘정산소종’으로 알려져 있다. 정산소종의 특징은 ‘송연향(소나무 훈연향)’이다. 유럽 카페 메뉴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랍상소총이 바로 ‘정산소종’이다. 홍차를 처음 만든 중국에서도 홍차를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저 이런 전설 같지 않은 전설만 남아 있다.

명나라 말, 복건성에 살던 한 농부가 찻잎을 따서 녹차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마을에 군대가 들이닥쳤다. 군대는 농부의 가공장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했다. 녹차를 만들려면 당장 찻잎을 덖어야 했지만 겁에 질린 농부는 찍 소리 못하고 가공장을 군대의 잠자리로 내어줬다. 찻잎을 다 망쳤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샌 농부는 날이 밝자마자 가공장으로 달려갔다. 전날 저녁 군인들이 가공장에서 밥해먹고 하면서 찻잎에 훈연향이 배어 있고 찻잎 색도 거무스름했다. 다 망했다며 탄식하다 그래도 혹시? 하며 차를 만들었다. 녹색이어야 할 차는 그러나 검은색으로 만들어졌다. 농부는 멀리 가서 차를 싸게 팔았는데, 다음 해 그의 차를 샀던 상인이 농부를 찾아와 작년에 팔았던 차를 또 만들어달라는 게 아닌가. 그렇게 정산소종이 세상에 나왔다나, 어쨌다나. 전설은 전설일 뿐.

실제 정산소종이 만들어지는 중국 복건성 무이암산 동목촌 지역은 1년 내내 안개가 많이 끼고 비도 많이 온다. 비가 오면 차를 말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인근 소나무를 베어 불을 때면서 말리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차에 훈연향이 배었다는 추정이 훨씬 그럴 듯하긴 하다.

세계 최초의 홍차 정산조송이 영국에 알려지고 많은 이가 정산소종을 좋아했는데 그레이 백작도 이 홍차를 엄청 좋아했다. 이후 중국으로부터 정산소종 수입이 원활하지 않자 그레이 백작은 직접 정산소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훈연’이라는 비법을 미처 몰랐던 영국인들은(지금도 정산소종 만드는 법은 중국의 국가급 기밀이다) ‘송연향’이 가향의 결과라 생각했고 무슨 향일까를 찾았다. 그때 ‘용안’이라는 이름의 동글동글한 과일향이 가향된 것 아니냐는 가짜뉴스가 돌았고, 용안과 모양이 비슷해 보이는 베르가못이 선택됐다. 베르가못 향을 입힌 홍차를 그레이 백작은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그래서 홍차 이름이 ‘얼그레이’가 됐다는 스토리.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홍차 ‘금준미’는 싹만 따서 만든다. 오른쪽은 완성된 금준미.
얼그레이는 백작을 뜻하는 ‘Earl’+‘그레이’ 수상 이름
그레이 백작 부인이 사교계에 ‘얼그레이’ 널리 퍼뜨려
사실 얼그레이를 유행시킨 사람은 그레이 백작이 아닌, 그레이 백작부인이다. 세기의 스캔들 주역인 데본셔 공작부인이 아니다.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계속 그레이와 만나면 아이들을 못 보게 하겠다는 데본셔 공작의 협박에 공작부인은 찰스 그레이와 헤어진다.

이후 그레이는 다른 여성을 만나 결혼했고 그 여인이 그레이 백작부인이다. 그레이 백작부인은 티파티를 자주 열었는데 늘 ‘얼그레이’를 대접했고 그렇게 얼그레이는 영국 사교계에서 유명해졌다.

이후 홍차 브랜드들은 ‘얼그레이’를 유행시킨 진짜 주역, 그레이 백작부인을 기린 홍차도 내어놓았다. 트와이닝의 ‘레이디 그레이’, 포트넘&메이슨의 ‘카운테스(countess는 여자 백작, 백작부인) 그레이’, 메쓰머의 ‘마담 그레이’ 등이다. 모두 베르가못 향에 오렌지 향을 좀 더 가향한 차로 알려져 있다.

그럼 우리 공작부인은 어떻게 되셨을까? 그레이 백작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딸을 낳은 공작부인은 그 딸을 그레이가에 보내고 이후 그레이와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레이가에 보내진 딸의 이름은 일라이자. 일라이자는 공작부인과 여러 번 만났지만 공작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을 몰랐다고. 이후 딸의 이름을 어머니인 공작부인 이름을 따서 ‘조지아나’라고 붙였다나. 데본셔 공작부인의 아가씨 시절 이름이 조이아나 스펜셔였다.

영화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주인공인 조지아나 스펜서의 초상화. 조지아나는 찰스 국왕과 이혼한 비운의 황태자비 다이애나의 5대조 고모 할머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데본셔 공작부인 조지아나 스펜서는 찰스 황태자와 이혼한 후 파파라치에게 쫓기다 운명한 비운의 황태자비 다이아나 스펜서의 5대조 고모할머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둘. 얼그레이를 탄생시킨 주역 ‘정산소종’은 언제부턴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동목촌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훈연향이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훈연향을 뺀 고급 홍차를 만들어 ‘금준미’라 이름 지었다. ‘gold’를 뜻하는 금은 최고라는 의미에서, ‘눈썹 미’는 싹으로 만들어 가늘고 여린 찻잎이 눈썹을 닮았다 해서 붙였다. 2005년 세상에 나온 ‘금준미’는 명품으로 인정받으면서 ‘가장 비싼 홍차’ 자리에 올랐다. 3g 한 포에 2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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