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안정인 기자]
▲ 벚꽃동산 빈무대 |
ⓒ 안정인 |
불이 켜지면 거대한 샹들리에가 달린, 모든 벽이 유리로 된 아름다운 방 안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녀인 두나샤는 6년 만에 돌아오는 집주인이 언제 도착할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한 사업가가 된 로파힌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잠시 후 우아하게 옷을 차려 입은 귀족 라네프스카야와 어린 딸 아냐, 엉뚱해 보이는 가정교사인 샤를로타와 하인 아샤가 도착한다. 백과사전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벚꽃 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영지에서 이렇게 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904년 초연된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이 작품을 보기 전 관객은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먼저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라네프스카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같은 이름이 나오면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극 중에서 이름을 전부 다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라네프스카야, 트로피모프, 에피호도프처럼 호명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조금은 안심해도 된다. 물론 연극이 끝난 후 누가 누구였더라? 하는 기분은 남는다.
다음은 시대 배경이다. 이 연극의 배경은 왕과 귀족이 계급의 상층부를 차지하던 러시아의 제정시대다. 작품이 발표되기 50년 전인 1861년, 러시아의 농노가 해방되었지만 극 중 인물인 충직한 하인 피르스처럼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생존해 있었다.
이 연극이 초연되던 1904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제정 러시아는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1917년 2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가 시작될 때까지 좀 기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서 왕과 귀족들의 목숨이 아직 온전하던 시기였지만, 전반적으로는 변화의 가속 페달을 밟던 시기였다.
▲ 벚꽃동산 포스터 |
ⓒ 안정인 |
벚꽃동산의 소유주인 라네프스카야는 몰락한 귀족이다. 그녀 자신이 이미 귀족이 아닌 사람과 결혼했을 정도지만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관심 없다. 그녀의 관심은 그녀 자신과 사랑뿐. 빚이나 생활비 같은 것은 귀족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그녀의 부모와 또 그 위의 조상들 모두 이 영지에서 농노를 부리고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그 열매를 팔아 수익을 내던 시기도 물론 있었지만 지금 이곳의 벚나무는 오래되어 해를 걸러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정도다.
남편과 어린 아들이 죽은 후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프랑스로 간다. 그곳에서 6년 동안 생활하면서 빈털터리가 된 후 마침내 벚꽃 동산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벚꽃 동산의 사정도 그렇게 좋지는 않다. 차곡차곡 쌓인 빛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 8월이면 경매에 넘어갈 예정이다. 라네프스카야 영지에서 생활하던 농노의 자식이자 그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로파힌만이 이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내놓는다. 영지를 정리하여 별장 부지로 임대하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벚나무를 잘라내고 별장을 만든다고? 귀족도 아닌 사람들이 내 영지를 돌아다닌다고? 말도 안 된다. 라네프스카야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지를 구할 다른 방법을 그녀는 가지고 있을까?
라네프스카야가 돌아온 후부터 벚꽃 동산 경매 직후까지의 시간이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경매가 주요 소재이므로 돈에 관한 언급이 많다. 라네프스카야는 돈을 함부로 쓰고, 그녀의 수양딸인 바랴는 살림할 돈이 없어 쩔쩔맨다. 비슷하게 몰락한 지주인 시메오노프는 끊임없이 돈을 꿔 달라고 말하고 지나가던 걸인도 당당하게 돈을 요구한다. 아름다운 벚꽃 동산 안에서 멋진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돈, 돈, 돈의 향연이다. 이미 권력은 돈에 넘어간 상태다. 그것에 적응하지 못한 귀족이 몰락해 가는 모습을 이 연극은 잘 보여주고 있다.
▲ 벚꽃동산 무대인사 |
ⓒ 안정인 |
하지만 이 무대를 보며 다른 느낌이 들었다. 벚꽃 동산을 구해서 결국 라네프스카야를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로파힌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로파힌은 어릴 때 라네프스카야에게 받는 따뜻한 손길을 잊지 못한다. 그녀가 없는 사이 성공한 로파힌은 그의 방식대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려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로파힌은 자신의 추억도 함께 담긴 이 벚꽃동산을 남에게 빼앗길 마음은 없다. 이별의 선물로 준비한 술을 그녀가 거부할 때도,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탁을 그녀가 건넬 때도 로파힌은 최선을 다한다. 이렇게 보니 연극은 완전히 다른 사랑 이야기처럼 보였다.
아마 로파힌 역을 맡은 이승주 배우의 열연 덕분에 이런 식의 몰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 20세기 초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억양은 낭독체이고 부자연스럽다. 그 시기의 대본이니 어쩔 수 없다.
"오 사랑하는 나의 동산, 아름다운 나의 동산, 나의 인생, 나의 젊음, 나의 행복이여. 안녕, 안녕."
이렇게 감정을 전달하는 시대의 작품인 것이다. 감안하고 연극을 바라봐야 한다.
최근에 만난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 없던 상상력이 솟아오를 정도다. 절실하게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한 계급이 완전히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110분의 시간이었다. 나는 과연 시대의 전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 연극. 명동예술극장에서 5월 28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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